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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꽃
―박영근에게
도종환
모과꽃 진 뒤 밤새 비가 내려
꽃은 희미한 분홍으로만 남아 있다
사랑하는 이를 돌려보내고 난 뒤의 감당이 안되는
막막함을 안은 채 너는 홀연히 나를 찾아왔었다
민물생선을 끓어 앞에 놓고
노동으로도 살 수 없고 시로도 살 수 없는 세상의
신산함을 짚어가는 네 이야기 한쪽의
그늘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늘 현역으로 살아야 하는 고단함을 툭툭 뱉으며
너는 순간순간 늙어가고 있었다
허름한 식당 밖으로는 삼월인데도 함박눈이 쏟아져
몇군데 술자리를 더 돌다가
너는 기어코 꾸역꾸역 울음을 쏟아놓았다
그 밤 오래 우는 네 어깨를 말없이 안아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한점 혈육도 사랑도 이제 더는 지상에 남기지 않고
너 혼자 서쪽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빗속에서 들었다
살아서 네게 술 한잔 사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살아서 네 적빈의 주머니에 몰래 여비 봉투 하나
찔러넣어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몸에 남아 있던 가난과 연민도 비우고
똥까지도 다 비우고
빗속에 혼자 돌아가고 있는
네 필생의 꽃잎을 생각했다
문학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목숨과 맞바꾸는 못난 꽃
너 떠나고 참으로 못난 꽃 하나 지상에 남으리라
못난 꽃,
⸺시집『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창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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