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민얼굴 /김명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0. 12. 24.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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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얼굴

 

김명인

 

 

노인이 안 보이고부터는 빈집인 줄 알았는데

어느 날 현관문에 금줄이 쳐지고

유체 정리반이 도착하고서

그 집, 한동안 망자 혼자서 지키던 독채로 밝혀졌다

여름 하수구를 녹여내는 듯 한동안 풍비하던

퀴퀴한 냄새의 정체가

온 동네에 고독사를 알린 그 사내 부고로 드러나면서

밤낮으로 출몰하는 소문 속 유령과 마주치지만

시신을 수습한 뒤에도 시취를 분해하던 오존은

몇 달이나 더 오래 이웃들에게

가까이 다가선 죽음을 각인시킬 것이다

그는 꽤 화려했던 독신주의자였다

한때는 웬만한 자동차보다 비싸다는 오토바이를 타고

해겨름의 해안 도로를 넘나들었다

텅 빈 냉장고 말라붙은 냄비 녹슨 식칼 이런 것들로

죽음을 베껴 쓴들 무슨 보고서가 될까?

세계의 끝까지 헤매고 싶었던 떠돌이의 족적은

마침내 칠흑에 비끄러매졌지만

한 뼘도 안 되는 둘레가 그에게도 혹독했음을

단란하게 웃고 있는 액자 속 순간들은 말이나 할까?

두 달이나 발견되지 않고 혼자서 지킨 죽음

어느새 숙성했는지 온몸이 검버섯으로 뒤덮였다

 

거기 누구요, 문 열고 내다보지 않아도

누구나 시시로 방 안에 우뚝 선 죽음의 민얼굴과 마주친다

 

 

 

시집여행자 나무(문학과지성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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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얼굴


김명인

 

 

노인이 안 보이고부터는 빈집인줄 알았는데

어느날 현관문에 금줄이 쳐지고

유체정리반이 도착하고서

그 집이 한동안 망자 혼자서 지켰던 것임을 알았다

여름 하수구를 녹여내는듯 한동안 풍비하던

퀴퀴한 냄새의 정체가

온 동네에 고독사를 알린 그 사내의 부고라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되면서 밤낮으로 출돌하는

소문속의 유령과 마주치지만

시신을 수습한 뒤에도 시취를 분해하던 오존은

몇 달이나 더 오래 이웃들에게

가까이 다가선 죽음을 각인시킬 것이다

그는 꽤 화려했던 독신주의자였다

한때는 웬만한 자동차보다 비싸다는 오토바이를 타고

해겨름의 해안도로를 넘나들었다

텅 빈 냉장고, 말라붙은 냄비, 녹슨 식칼, 이런것들로

저 집을 베껴 쓴들 무슨 보고서가 될까

세계의 끝까지 헤매고 싶었던 떠돌이의 족적은

마침내 침상 둘레에 비끄러매졌지만

한뼘도 안 되는 세월이 그에게도 혹독했음을

단란하게 웃고 있는 사진속의 순간들은 알기나 할까

두달이나 발견되지 않고 혼자서 지킨 죽음

어느새 숙성했는지 검버섯이 온몸을 뒤덮었다

거기 누군가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누구나가 시시로 방안에 우뚝 서 있는 죽음의 얼굴과 마주친다

 

 

 

―계간『시인 시각』(201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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