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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읽기의 즐거움 [ 이승훈 유고작 ](홍성란 시조집 해설 미수록작)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4. 27.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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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훈 유고작 ]


                                                              시조 읽기의 즐거움
                                                                                     
                                                                                      (홍성란 시조집 해설 미수록작)




                                                                                                           이승훈






2020년 11월 26일 12시 경, 유심 사무실에 갔었다. 거기서 몇 분 시인을 만나 담소하는 도중에 이승훈 선생님의 미발표 원고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2008년 ~ 2009년 사이에 쓰신 홍성란 시인의 작품 해설이라고 했다. 시집이 2013년에 나오는 바람에 신작이 많이 추가되어 싣지 못했다는 사실도 알았다. 선생님의 시조 해설은 유일무이하기에 자료적 가치도 높다. 마치 선생님 살아 오신 듯한 기쁨에 설렜다. 홍성란 시인께 간곡히 부탁해서 원고를 입수하여 이번호 《예술가》에 싣게 되었다. 얼마 전 이승훈 선생님 3주기[2018년 1월 16일 영면]가 지났다. 그래서 이 지면이 더 뜻깊다. (이형우)


1


내가 시조에 관심을 둔 것은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고 수상하고 의아한 일이다. 난 원래 이른바 자유시가 전공이고 그것도 아는 분은 알겠지만 난해한 시를 썼고 최근에는 시인지 일기인지 모르는 시를 발표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자유시를 그야말로 자유롭게 쓰고 다소 개판을 치는 입장이다. 그런데 전통적인 정형시인 시조에 관심을 두다니? 이상한 일이 아닌가? 세상일은 알 수 없다더니 내가 그 꼴이다. 아무튼 최근에 나는 잡지에 발표되는 자유시는 거의 읽지 못하는 상태이고 그건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최근에 발표되는 시들이, 특히 젊은 시인들의 시가 소통이 안 되고 너무 수다스럽고 문맥이 안 통해서 나 같은 시인은 도무지 읽을 힘도 없고 재미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 시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이런 혼란, 무질서, 사설, 넋두리, 수다가 지겹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시조에 관심을 두는 것인지 모른다.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이번에 시조집을 내는 홍성란을 비롯해 몇몇 시조 시인들의 작품은 신선한 느낌이 든다. 현대시가 진부해서 상대적으로 시조가 신선하고 재미있다. 


홍성란의 시조는 최근의 우리 시가 보이는 잡스러움이 없고 무엇보다 읽을 수 있어서 좋다. 쉽게 읽히는 게 얼마나 좋은가? 소통은 모든 시의 최소한의 조건이다. 어디 소통뿐인가? 내가 처음 그의 시조를 읽고 좋군! 속으로 중얼댄 건 그의 시집 『바람 불어 그리운 날 』을 읽고 특히 표제작 「바람 불어 그리운 날」이 보여주던 여린 감성과 냉정한 감각과 무엇보다 따뜻한 정한 때문이다. 그의 시엔 억지가 없고 그는 시를 만들지 않는다. 이 시는 지금도 가끔 찾아 읽는다. 이 글을 쓰다 말고 난 이 시를 찾아 옮긴다. 


   따끈한 찻잔 감싸쥐고 지금은 비가 와서


   부르르 온기에 떨며 그대 여기 없으니


   백매화 저 꽃잎 지듯 바람 불고 날이 차다


통사 구조도 예사롭지 않다. 초장의 경우 전통적인 어법이면 전반부와 후반부의 순서가 바뀌는 게 옳다. 지금은 비가 와서/ 따뜻한 찻잔을 감싸는 것이지 찻잔 감싸쥐니까 비가 오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이 시의 경우 두 구절의 순서가 바뀌면서 이 구절은 중장과 관련된다. 이른바 양행걸림enjabement 기법이다. 그러니까 초장은 완결 시행이 아니고 초장이면서 중장과 이어진다. 이런 기법은 초장(명제)/ 중장(반명제)/ 종장(종합 명제)의 형식을 은밀히 파괴한다. 중장의 ‘그대 여기 없으니’ 역시 앞 구절 ‘부르르 온기에 떨며’와 종장 ‘백매화 저 꽃잎’ 양쪽에 걸린다. 이런 기법에 의해 그의 시조는 전통과 현대가 만나 어우러지며 신선한 느낌을 준다. 듣기로는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이 「시조의 형식실험과 현대성의 모색 양상 연구」라더니 아마 그가 관심을 두는 부분이 이런 실험성인 모양이다. 이런 실험은 좋다. 이 시는 이런 실험뿐만 아니라 그리움의 정서를 드라이하게 표현한 게 좋고 그러니까 간결하고 담백하고 고요한 감각이 좋다. 


2


그만큼 그는 천부적으로 시적 감성을 지닌 것 같고 재주 없는 시인들이 너무 많은 우리 시단에 이런 시인이 있다는 게 고맙다. 이번에 내는 시집에 해설을 쓰게 된 것 역시 그의 여린 감성과 재주를 믿기 때문이다. 이번 시집이 보여 주는 새로움은 이런 형식실험 외에도 자아와 사물에 대한 새로운 질문과 인식으로 요약된다. 1부는 좀 비약해서 말하면 공의 세계, 2부는 이런 공을 전제로, 혹은 매개로 하는 자아의 세계, 3부는 공이 아니라 무, 죽음의 세계이다. 이렇게 요약하고 보니 내가 생각해도 과찬인 것 같다. 그는 삶의 느낌을 썼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시를 해설할 뿐이고 모든 해설은 해석이고 해석은 시각이고 시각은 입장이다. 그러니까 이런 해석은 나의 시각이고 나의 입장이기 때문에 다른 입장에선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먼저 1부 맨 앞에 나오는 「아디오스」가 눈길을 끈다.


   받지 않을 전화를 걸어 
   흐르는 노래 듣는다
 
   구름 가는 테라스 솜털 씨 멀리 흩어서


   하늘도 
   느티나무 가지 사이 오래 오래 지나간다


난 처음 ‘아디오스’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이 시를 읽었다. 내가 원래 좀 무식하고 또 시를 읽는데 사전까지 뒤지며 읽는 건 좀 웃기는 짓 같고 내가 이런 부분에선 게으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설을 한다면서 모르는 낱말을 그대로 넘어갈 수는 없고 그래서 지금, 그러니까 이 글을 쓰다 말고 사전을 뒤져 본다. 국어사전엔 이 낱말이 없다. 귀찮지만 할 수 없이 영한사전을 찾아본다. adios는 스페인어로 안녕, 이별을 뜻하고 불어로는 adieu라고 되어 있다. 과연 현대시조답다. 아디오스가 다르고 안녕이 다르고 이별이 다르고 작별이 다르고 고별이 다르고 결별이 다르다. 


문제는 시다. 초장은 애인에게 전화를 거는 이야기, 중장은 테라스 풍경, 종장은 느티나무 풍경이다. 그러니까 시의 공간은 방-테라스-느티나무로 발전하고 시인의 시선은 내부에서 외부로 옮겨간다. 초장을 지배하는 것은 청각의 세계이고 중장과 종장을 지배하는 것은 시각의 세계이다. 청각의 세계는 가깝고 시각의 세계는 멀다. 그러나 이 시의 경우 청각의 세계는 멀고 가깝다. 시의 화자는 애인에게 전화를 건다. 그러나 상대방의 목소리 대신 흐르는 노래 소리만 들린다. 이 소리는 애인의 목소리도 아니고 애인의 목소리가 아닌 것도 아니다. 애인의 목소리가 아니기 때문에 멀고 한편 애인의 목소리이기 때문에 가깝다. 또한 이 노래가 암시하는 것은 애인의 현존도 아니고 부재도 아니다. 애인은 떠났지만 떠난 게 아니고 떠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만해 한용운은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고 노래하고 홍성란은 전화에서 흐르는 노래를 듣는다. 이 노래는 구름 가는 테라스 멀리 흩어지는 솜털 씨로 변주되고 마침내 ‘하늘도 느티나무 가지 사이 오래오래 지나간다’로 완결된다. 완결인가? 완결이 아니다. 그가 여기서 읽는 것은 느티나무 가지 사이로 오래오래 지나가는 하늘이고 이런 이미지가 보여 주는 것이 이른바 공과 통한다. 가지 사이는 비어 고 이 공에 의해 하늘의 움직임이 나타난다. 그러니까 이 하늘은 유이며 동시에 무이다. 말하자면 공(가지 사이)은 유(움직이는 하늘)를 나타나게도 하고 또 그 유가 무로 사라지는 것을 가능케 한다. 이런 세계는 공이면서 색이고 색이면서 공, 이른바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세계다. 그렇지 않은가? 나무 가지 사이는 공이면서 색이고 색이면서 공의 세계다.


이런 세계가 강조하는 것은 공에도 머물지 말고 유에도 머물지 말라는 것. 그러므로 법장法藏은 말한다. 만약 공에 머물면 유의 의미를 잃고 만약 유에 머물면 공의 의미를 잃게 되니 공은 유와 다르지 않고 유는 반드시 공을 품고 있다. 색은 공에 의해 있고 공은 색에 의해 나타난다(色依空立 空約色明). 한편 하이데거가 말하는 숲속의 빈터를 회상하자. 이 숲속의 빈터가 이른바 空에 속하는바 
그는 말한다. 빛이 숲속의 빈터, 공을 창조한 게 아니라 빛은 그저 지나갈 뿐이다. 빛의 존재는 빈터에 의존하고 따라서 빛이 먼저 빈터(공)를 창조한 게 아니라 공이 빛(유의 색)을 나타나게 하고 빈터가 유를 무로 사라지게 한다. 따라서 공은 유무 불이의 세계다.


홍성란은 이별의 끝에서 나무 가지 사이로 오래 오래 지나가는 하늘을 본다. 이런 세계는 비탄을 모르고 비틀거리지 않고 비탈길도 아니고 아무튼 일상의 정서를 극복한 빈 마음, 마음의 空이 볼 수 있는 세계다. 이제 그의 시에서 이별은 그리움, 탄식, 한탄, 울음이 아니라 이런 세계를 극복한/하려는 禪불교가 강조하는 고요, 텅 빈 마음을 낳는다. 이런 세계에 도달하기란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 이런 마음의 세계는 다음 시에선 이른바 인드라망, 곧 화엄적 사사무애事事無碍의 세계로 발전한다. 


   휴지도 좀 떨구고 꽁초도 좀 버려줘야
 
   공원의 청소부도 할 일은 좀 만들어줘야
 
   물 위에 
   수련이 떠올라 잠자리 날개 쉬고 있다


시인 자신이 제목을 「인드라망」이라고 정한 시 전문이다. 인드라망은 제망帝網, 곧 하나하나의 연결 매듭에 구슬 옥玉이 매달려 서로 비추고 비친 옥이 또 비춰서 무한하게 서로 반영하는 관계로 많은 사물이 중중무진하게 교섭하는 것. 초장과 중장의 관계가 그렇고 종장의 경우엔 물 위로 떠 오른 수련과 잠자리의 관계가 그렇다. 이른바 사사무애의 세계. 나(초장)와 청소부(중장)의 관계가 그렇고 수련과 잠자리의 관계가 그렇다. 이런 시에선 인간도 사물이 되고 따라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사물과 사물은 대립되는 게 아니라 서로 넘나드는, 상호 구속이 없는 무애의 세계가 드러나고 이때 우리들의 삶은 자유로운 경지에 든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세계내존재를 이런 시각에서 새롭게 해석할 수 있지만 이 자리는 선과 하이데거의 관계를 논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만 제기한다. 이런 무애의 세계가 다음 시에선 이른바 다즉일多卽一 일즉다一卽多의 원융이라는 화엄적 사유로 변주된다. 


   그대 창문 앞 


   그대 텅 빈 뜨락에


   세계를 뒤흔들어 놓고
   사라지는 
   가랑잎 
   하나


「춤」의 중장과 종장이다. 시조의 가락을 유지하면서 형태를 변형시킨 이런 변형 시조가 주는 신선한 감각도 좋고 무엇보다 종장에서 노래하는 ‘세계’와 ‘가랑잎’의 관계가 좋다. 아니 이런 이미지는 좋은 게 아니라 놀랍다. 세계가 多의 세계라면 가랑잎은 一의 세계이고, 전자가 理의 세계라면 후자는 事의 세계이다. 그러나 가랑잎 하나가 세계를 뒤흔든다는 점에서 多가 一이고 一이 多이고 事가 理이고 理가 事이다. 세계를 뒤흔들어 놓고 가랑잎은 어디로 갔을까?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내가 던지는 화두이다. 


방 거사는 어느 날 강서 지역에서 이름을 날리던 마조馬祖 선사를 찾아가 묻는다. “선사. 만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는 존재는 무엇입니까?(不與萬法爲侶者 是甚麽)”. “한 입에 서강의 물을 다 마신다(一口吸盡西江水)”. 그때 선사가 한 말이다. 물론 솔직히 말해서 나도 이게 무슨 소린지 모른다. 그럼 왜 마조 선사의 말씀을 인용하는가? 그건 나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서강은 양자강. 한 입은 일(一)에 해당하고 양자강은 다多에 해당한다. 한 입에 마셔도 양자강이고 두 입에 마셔도 양자강이다. 그렇다고 양자강이 사라지겠는가? 한 입에 든 것도 양자강이므로 일즉다요 다즉일이다. 그럼 양자강을 뒤흔들어 놓고 사라지는 가랑잎 하나는 어디로 갔을까?


1부에서 내가 관심을 두고 읽은 시들은 이상에서 말한 공의 세계이고 이런 이미지는 ‘갠 하늘’에 ‘새파랗게 떠나’는 새(「그 새」), ‘가다가 되돌아본 사이/ 영원이 고여 있’는 세계(「산책」), ‘돌이 죽지 않은’ ‘돌탑’(「돌」) 등에서도 드러나지만 2부에 대해서도 써야 하기 때문에, 물론 안 써도 되지만, 앞에서 2부, 3부의 특성을 요약한 것도 있고 해서 이제부터 2부에 대해 해설하자. 26 예술가 2021 봄호 27


3


앞에서 나는 2부의 특성을 1부가 보여주는 공의 세계를 전제로, 혹은 매개로 하는 자아의 세계라고 그럴듯하게 요약했지만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렇게 거창한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시인이 2부로 나눈 건 장난삼아 그런 게 아닐 것이고 그러니까 나대로 2부의 특성을 살필 의무가 있다. 내가 읽은 바로는 1부가 주로 사물들의 관계에서 空을 읽는다면 2부에선 자아(시인)와 타자, 혹은 자아와 사물의 관계가 강조된다. 물론 공이 이런 관계를 매개한다. 어떻게 매개하는가? 매개는 매각이 아니다. 그러니까 공이 이들의 관계를 팔아먹는 게 아니다. 2부 맨 앞에 나오는 시의 제목은 「네 안에 가고 싶다」이다. 어떻게 네 안에 갈 수 있단 말인가?


   생각이 너무 많아 네 생각이 덮는 저녁 


   네 안에 가고 싶다 그 길에 서고 싶다


   길에서
   길을 버리고 
   길 없는 길 가고 싶다


이 시는 두 편의 시조가 연결되는 연시조 형식이고 각 장 사이에 행간이 있고 종장은 3행으로 된 변형 시조. 인용한 것은 앞 부분 시조이다. 네 생각이 너무 많아 네 생각이 나를 덮는 저녁, 너의 생각으로 덮이는 저녁 화자는 ‘네 안에 가고 싶다’라고 말한다. 어떻게? ‘길에서 길을 버리고 길 없는 길’을 가면 되고 길 없는 길이 空과 통한다. 길 없는 길은 마음의 길이고 이 길이 마을의 길일 수도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을이 마음이다. 그러니까 그 길을 가는 건 마음의 길을 가는 것. 일종의 수행이고 수행이 되어야 한다. 길을 간다는 것 자체가 수행이기 때문이고 길을 가는 건 미음의 길을 닦고 동시에 없애는 것. 


시의 후반에서 그는 ‘생각이 너무 많아 네 생각이 덮는 저녁’이라고 노래한다. 길 없는 길, 마음의 길에서 그가 만나는 것은 자신이 ‘네 생각이 되는 것’. 이제 나는 너의 생각으로 덮히는 게 아니다. 생각이든 이불이든 무엇에 덮이는 건 괴롭다. 누구 등에 업히는  건 행복하고 누가 나를 덮는 건 고통이다. 무엇이 나를 덮으면 숨이 차고 숨이 막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의 길을 매개로 이런 은폐는 사라지고 내가 너의 생각이 됨으로써 이런 은폐는 드러남, 개방, 현전이 된다. 글이 다소 어렵게 흘러가는 것 같다. 요컨대 은폐와 현전, 하이데거식으로 말하면 은폐와 비은폐로서의 진리다. 그러니까 너의 생각에 의해 은폐된 자아는 마음의 길, 공을 매개로 비은폐의 공간, 열림의 공간, 개방의 공간으로 나간다는 것. 나를 덮든, 은폐하든 네 생각 자체가 될 때 나는 개방되고 빛이 된다. 그러므로 후반의 중장에선 자아가 ‘네가 낸 오솔길 따라 굽이굽이 흩날리고’, 종장에선 ‘기슭에 익은 달뿌리풀’을 본다. 이제 그는 개방되고 가벼워지고 이런 가벼움이 자유와 통한다. 이런 공의 세계, 마음의 세계, 길 없는 길을 가는 마음의 세계는 다음 시에서 행위에 대한 이유가 선불교적 인식으로 연결된다.


   담배를 배울 걸 그랬다
   성냥골 그어 당기게


   누가 봐도 일없이 불장난한다 하지 않게


   성냥골 확, 그어 당기면 
   당긴 이유 보이게


「저녁」에서 홍성란은 담배를 배울 걸 그랬다고 한다. 물론 배우지 않기를 잘했다. 문제는 홍성란의 경우 담배를 배우는 이유가 ‘성냥골 그어 당기는 데 있다는 것’. 나는 이 시행이 너무 좋다. 아이들처럼 천진한 게 좋고 순수한 게 좋고 이런 게 나하고 통하는 부분이다. 도대체 성냥을 그어 보기 위해 담배를 배우다니? 난 무엇도 모르고 배웠지만 얼마나 아름다운가? 


더 기가 막히는 건 ‘성냥골 확 그어 당기면 당긴 이유 보이게’라는 시행이다. 성냥을 켜는 이유는 담배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의 경우엔 성냥을 켜는 이유가 성냥을 켜는 행위와 하나가 된다. 담배도 빠지고 남는 건 그저 성냥 켜는 행위이고 이 행위가 성냥 켜는 이유이다. 사는 데 무슨 이유가 있고 근거가 있는가? 이 시가 선禪 인식과 통하는 건 이런 진술 때문이다. 삶에는 무슨 근거, 자성, 본질이 없고 그가 의식했든 못했든 이런 시행은 주체 없음, 무아無我 사상을 암시한다. 


하이데거는 ‘장미는 이유 없이 존재한다. 장미는 핀다. 왜냐하면 장미는 피기 때문이다.’라는 실레시우스의 시를 해석하면서 본질주의가 강조하는 이유, 토대, 본질을 비판한 바 있다. 김형효 교수에 의하면 ‘이유 없이’는 객관적인 이유를 묻는 말이고 ‘왜냐하면’은 이미 이유를 내포하는 말. 이유는 있는가, 없는가?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시행을 선불교의 불이不二 사상으로 해석하는 입장이다. 요컨대 장미가 피는 것은 장미가 피기 때문이고 성냥을 긋는 것은 긋기 때문이다. 홍성란의 시에서 내가 읽는 것 역시 비슷하다. 좀 과장된 해석인가? 그건 그렇고 이런 선적 인식은 자아에 대한 의단疑團으로 나간다. 의단은 수행의 도상에 일어나는 의문. 그렇다면 그에게도 시 쓰기는 수행인 셈이다. 


   하느님은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몸 있는 데 마음도 붙어 있어야 할 것을
   몸 닮아 마음도 보이게 만들어야 할 것을


「저녁 의단」 전반부이다. 몸은 보이고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이 시 역시 세 편의 시조가 연결된 연시조 형식. 둘째 시조에서 몸/마음의 갈등은 마음이 ‘너 있는 곳’에 가기 때문에 빈 몸만 남는다는 것으로 발전하고 그러니까 마음은 가고 몸은 못 가는 신세로 나타나고 마침내 셋째 시조에서 그는 ‘사무치는 건 몸인가, 마음인가?’라고 묻는다. 이런 그리움은 전통 시조의 전통적인 주제. 그러까 이 시조가 현대성을 획득하는 것은 몸과 마음의 문제를 있음, 곧 존재와 관련시키는 점에 있다. 몸도 있고 마음도 있지만 마음은 가고 가는 마음은 있으면서(유) 없고 없으면서(무) 있다. 너와 나의 관계가 공을 매개로 한다는 것은 이런 인식 때문이다. 이런 인식은 ‘찾아도 찾을 수 없네 잃은 데를 모르네’ (「하리에서」), ‘걷어찬 돌멩이도 탁 튀어 꽃이 되는 오월’ (「새들아 오너라」) 등에도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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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3부. 나는 앞에서 3부는 공이 아니라 무, 죽음의 세계라고 요약했다. 공이 유/무를 초월하는 세계, 혹은 공은 유와 다르지 않고 유가 공을 품고, 색이 공에 의해 서고 공이 색에 의지하는 세계라면 여기서 말하는 무는 그런 점에서 공에 이르지 못한 심적 공간이고 따라서 마음이 빈터로 허공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마음이 무엇으로 차고 그늘진다. 그래서인가? 시의 형식 역시 이른바 사설시조 형식이 많다. 말하자면 중장이 길고 이 긴 형식은 사설과 먼지와 티끌로 가득 찬다. 


물론 3부에 수록된 시조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같은 사설시조 형식이지만 「장강 가는 길」의 초장에 나오는 ‘한가한 산허리 돌아가는 구름 그림자’가 보여 주는 공의 세계나 종장에 나오는 ‘까만 염소가 돌보’는 ‘매 맞고 쫓겨난 귤나무들’이 보여 주는 사사무애의 세계는 놀랍다. 그러나 이 시집의 표제로 되어 있는 「즐거운 복사꽃」은 사정이 다르고 내가 여기서 읽는 것은 공, 혹은 유와 동거하는 무가 아니라 홀로 있는 무, 죽음이다. 


   돌아오지 않으리,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


  우줄거리는 섬강 물 위에 뜬 복사꽃잎 맑을 것도 없는 물결 더불어 웃으며 돌아오지 않으리, 병든 어미 벌판에 버리고 죽은 아비 땅 속에 묻고 어느 기슭에  닿았는지 어디 떠가는지 아무도 모를 행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오직 하나 즐거움이여 어제의 꽃잎이여, 흐느끼는 강물 물 위에 뜬 영원의 껍데기, 늑대별이거나 개밥바라기이거나 어느 별에도 닿지 않으리 어미 아비 잊어버리고


   나 죽어 
   아무도 모를 거처,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


「즐거운 복사꽃」 전문이다. 섬강에 뜬 복사꽃을 노래하는 시. 그러나 초장〮중장〮종장이 모두 ‘돌아오지 않으리’로 반복되고 이런 고백은 물론 복사꽃의 독백이고 이 꽃에 시인의 정서가 투사된다. 2부에 비하면 3부에서는 다소 절제가 풀린다. 그만큼 시의 할 말이 많은 것 같은데 그 무수한 말들을 요약하면 무, 죽음의 세계이고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어조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생에 대한 비탄이고 한이고 원통함이다. 그러므로 ‘맑을 것도 없는 물결’과 더불어 웃으며 돌아오지 않겠다는 다짐은 처연할 정도다. 물 위에 웃으며 떠가는 복사꽃이 아이러니가 아니라 정서의 공간에 머무는 것은 시인의 마음이 유와 무, 존재와 부재, 정착과 흐름, 생과 사를 대립적으로 사유한 결과인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나는 같은 無를 노래했지만 「설인雪人에게」같은 시가 좋다. 


   눈 오는 날
   아무도 찾지 않는 산굽이 돌아 네가 날 찾으면 좋겠다


  돌아보면 내 발자국만 따라오는 다들 버린 산길이라도 고스란히 쌓이는 눈 깊은 산길이라도 설레어 찾아가는 길 미끄러질까 더듬어 놓는 발길이면 어때 그러나 무시무종 파랑 치는 잔물결이면 어때
  붉은 이마 식히는 찔레처럼 눈송이 휘도록 얹은 강아지풀처럼 네게 말하고 싶어 머리 가슴 배 동그란 마음 돌돌 굴려 어디 가두어둘까 눈 하고 사랑하려다  장난만 치고 돌아왔다고 그러나 무시무종 파랑치는 잔물결이면 어때


   그러니 고스란히 내려앉는 눈 문득
   네 얼음집에 갇히었으면 좋겠다


「설인에게」 전문이다. 설인은 눈사람. 홍성란은 눈 오는 날 눈사람을 기다리고 마침내 눈사람은 고스란히 내려앉아 얼음집이 되고 그는 그 집에 갇히면 좋겠다고 말한다. 눈사람은 사람도 아니고 사람이 아닌 것도 아니다. 문제는 눈사람의 죽음, 소멸, 무가 공과 통한다는 것. 고스란히 내려앉는 눈사람은 유이면서 무이고 존재이면서 부재이고 한 마디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세계다. 한편 눈사람은 내려앉아 얼음집이 된다. 


같은 물을 매개로 하지만 눈은 부드러움을 암시하고 얼음은 차가움을 암시하고 눈은 생명, 얼음은 죽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눈사람-소멸-얼음집의 이미지는 물(생명)-눈-(죽음)-얼음(죽음)의 단계를 내포하고 따라서 이 시에 나오는 눈사람의 죽음은 생명과 죽음 사이에 있는 죽음이고 이런 죽음, 무, 소멸이 공을 지향한다. 한편 눈사람은 눈이면서 사람이고 얼음집도 얼음이면서 집이다. 난 이렇게 분석적인 게 병이다. 한이 없다. 여기서 멈추자. 3부엔 언어와 사물의 관계를 노래한 「사구에서」, 「오래된 버릇」 같은 시도 있지만 그만 써야 하겠다. 이것도 오래된 버릇인가? 


내가 그만 쓰는 것은 지금 날씨가 흐리기 때문이다. 날씨가 흐리면 집중이 안 되고 눈의 피로도 심하고 무엇보다 이런 해설은 너무 길면 읽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처음엔 2백자 원고지로 50매 정도 생각했던 것이 60매 가까이 되었으니 내가 나한테 미안하고 홍성란 시인에게도 미안하고 독자들에게도 미안하다. 최근의 화두는 무산 오현 스님의 선어禪語 ‘봉우리 봉우리마다 차디찬 잿빛 마른 나무(堆山績嶽 寒灰枯木)’이다. 이 나무는 무엇인가?▩


                                                                                                                                                           -《예술가》, 2021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