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눈물의 발원지 /권선희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7. 16.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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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발원지

권선희


종합운동장 맞은편 2층 유방외과에서 오른쫀 악성신생물 진단을 받았을 때
기가 찼다. 계단에 주저앉아 도로를 질주하는 낙엽들을 바라보며 암만, 시인 생에 하나쯤은 다녀가야지.

암병원 5번방에서 오른쪽, 왼쪽, 림프 전이까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찔했다. 화장실 벽에 기대어 이번 생은 조졌구나
생이 화투판이라면 화끈하게 판을 엎어야 하는 거 아닌가.

수술 후, 문드러진 가슴도 가슴이라고 빼또롬하게 남겨 놓은 젖꼭지를 만지며
볼 놈도 없는데 확 밀어버릴 것이지.

방사선 치료를 위해 남자가 내 가슴에 보라색 십자가를 세 개나 그릴 때
어이쿠, 하필 밥 버는 일이 초토화된 젖퉁어리에 종일 십자가를 긋는 것이라니

요양병원 1305호 내 옆 침대에는 마흔네 살 어린이집 원장이었던 여자
겨울 내내 밥 한 술 못 먹다 벚꽃 피자 죽어 나갈 때
늙은 어미가 벽에 걸린 딸의 긴 머리 가발을 챙길 때
비로소 씨팔노무 인생, 눈물이 시작되었다



―계간『사람의문학』(2021,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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