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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53) / 아아 어찌 잊으랴 - 이덕진의 '피의 능선'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1. 13.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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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53) / 아아 어찌 잊으랴 - 이덕진의 '피의 능선'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53) / 아아 어찌 잊으랴 - 이덕진의 '피의 능선'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53) / 아아 어찌 잊으랴 - 이덕진의 '피의 능선'

 

피의 능선

이덕진

 

여기 지금 살육을 본다 

지구도 하늘도 까무러질 듯 
포는 우는데 
지그시 떠오르는 아침 햇빛이 
비둘기색 1211고지를 황홀히 빚어낸다. 

악착스러운 인간의 생과 사의 찰나에,
육과 육, 피와 피의 난무! 
아아 임리(淋漓)한 선혈이 굴곡된 계곡을 붉히고 
산형이 변하여 시체가 첩첩할 때 
능선은 피를 빠는 하나의 악귀 

만대에 계승될 또 하나의 피비린내 나는 
장엄한 전설이 생겼다. 
태고와 같은 전장. 
전우는 용감히 쓰러진 전우를 다시 부른다. 

—『전선문학』창간호(1952.4.10)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53) / 아아 어찌 잊으랴 - 이덕진의 '피의 능선'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해설>

장훈 감독의 영화 <고지전>이 실감나게 그린 피의 능선 전투는 1951년 8월 17일부터 시작되어 9월 3일에 끝난 한국전사상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 미국 제2사단과 국군 제5사단 제36연대가 양구 북방 피의 능선을 공격하여 북한군 제12, 24사단과 밀고 밀리는, 뺏고 빼앗기는 전투를 벌여 결국은 능선을 점령했다. 이 전투로 북한군은 펀치볼 북쪽 능선으로 물러섰고 한ㆍ미 양군은 백석산과 대우산 간의 측방도로를 확보했다. 그런데 시인에게는 이런 승전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덕진은 “산형이 변하여 시체가 첩첩할 때” 같은 묘사를 통해 전투의 실상을 전달하는 한편 “능선은 피를 빠는 하나의 악귀”라고 하면서 전쟁의 무자비함을 통탄했다. 우리가 이겼다고 환호하는 대신 쓰러진 전우를 외쳐 부르는 국군을 등장시켜 우리가 어떻게 치른 전투인지를 들려주고 있다. 그는 이 전투가 “만대에 계승될 또 하나의 피비린내 나는/장엄한 전설”이 될 것임을 예감했다. 그때 전사한 2,700명 국군과 유엔군의 명복을 빈다. 

이덕진 시인은 일제 말 징병에 끌려가 중국 남경에서 광복을 맞고 귀국해 동국대학을 다녔다. 교사로 있을 때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종군작가단에 들어가 상임감사로 활동했고 휴전 후 언론인으로 살아갔다. 종군작가단이 만든 『전선문학』 총 7권에는 35편의 시가 실려 있다. 

출처 : 뉴스페이퍼(http://www.news-paper.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