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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사치
최수일
내 나이 스무 살 무렵 방황이 찾아왔다
대학 강의실을 떠나 산과 들로 떠돌고
해지면 허름한 술집을 찾기 일쑤였다
이 방황이 혹 치유가 될 수 있을까
군에 자진입대했다
야간 보초를 서며 별들과 얘기를 나누고
지나는 바람을 붙잡고 내 마음을 털어놓았다
사역을 자처해 몸을 혹사하고 애써 훈련을 받았다
그렇게 군 생활에 익숙해져 가던 어느 가을밤
반짝이는 별 하나 북쪽 하늘에서 처음 만났다
그즈음 대학생이 되어 미래를 꿈꾸고 있을 예쁜 누이
한강철교 위에서 푸른 하늘로 날아올라
홀연히 별이 되었다는
누이의 소식을 너덜거리는 주머니 속에 담고
미아리 돌산 밑 가난한 우리 집에 들어섰을 땐
누이의 어떤 흔적도 집안에 남아 있질 않았다
그 후 가족 그 누구도 누이의 이름을 입에 담질 않았고
내가 군 복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모두가 다 누이를 잊은 듯했다
그렇게 누이는 내 기억에서 차츰 사라졌고
어쩌다 생각이 날 때도 애써 잊으려 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내가 젊은 시절에 애써 풀어보려 했던
굳이 외면하고 살아왔던 숙제를
역마살 낀 내 삶의 해解를 풀어보겠다며 시를 쓴다
과분한 사치奢侈를 누리며 한강철교를 건너다니다
문득 이렇게 누이를 불러본다
그때 누이는 한때 나처럼 뭔가가 그립고 또
외로움을 못 이겨 방황했던 건 아니었는지
영특했던 내 누이가 그때 이미
詩人이 됐던 것은 아니었는지
그런 그 누이를 그리워하며 시를 쓴다
―『착각의시학』(2021.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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