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실업이 익어가는 동안 /이이화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1. 26.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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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이 익어가는 동안

 

이이화

 

 

비정한 도시가 나를

아웃사이더로 만들었지요

덩치 큰 빌딩이 거만하게

접근을 막으며

재빨리 지퍼를 채웁니다

표정을 삭제한 사람들이

콘크리트 협곡 사이를

분주히 뛰어다니며 실업을

피워 올립니다

주인이 사라진 자리를

허겁지겁 뜯어먹으며

육식의 사회가 허기를 견딥니다

내동댕이쳐진 사막에서

어린 왕자의 작은 별을

사들일 궁리를 하느라 나는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 갑니다

커다란 깃털 속에 저장된

사막여우의 지혜를

속성으로 배워야 합니다

작은 별의 문서를 내 손에 쥐는 날

수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만든

장미를 해고시키고

어울리지 않는 갑질도 한 번

해봐야겠어요

별과 바람을 소유한 나는

완벽한 사막의 원주민이니까요

속달로 배달된 태양이

선인장꽃 밀어올리는 언덕에서 말을 멈추고

달콤하게 영혼을 익혀갈 때

누구라도 한 번쯤

나의 안부를 물어 와 주세요

 

 

 

―시집『칸나가 피는 오후』(그루,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