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가로등에 매달린 화분
최수일
왕십리역 사거리에 가로등이 꽃을 피웠다
꽃나무로 변신한 가로등을 지켜보다
오래전 어느 가을 운동회를 생각한다
한쪽 발은 발받이 딛고
남은 발은 허공 딛고 기둥에 매달린 아이들
한쪽 손은 기둥을 잡고
다른 손은 앞뒷면 색이 다른 카드를 들었다
긴 호루라기 소리에
기둥에 울긋불긋 카드꽃이 피어난다
짧은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꽃의 색깔이 홱홱 바뀌던 카드섹션
색색의 꽃을 피워내다
손에 힘 풀려 땅바닥에 굴러떨어졌던,
가로등꽃을 지켜보다 새삼
그날의 박수 소리와 함성을 듣는다
순간, 무례한 한 무더기 바람이
가로등에 매달린 화분 하나를
땅바닥에 툭 던져버리고 달아난다
화분에 갇혔던 꽃의 맨발이 찬 바람에 노출되고
그 연약한 발이 땅바닥을 더듬기 시작한다
―『착각의시학』(2021. 겨울호)
'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울의 습관 /마경덕 (0) | 2021.11.27 |
---|---|
눈오리집게 /홍계숙 (0) | 2021.11.27 |
또 하나의 사치 /최수일 (0) | 2021.11.27 |
실업이 익어가는 동안 /이이화 (0) | 2021.11.26 |
낙월도 민박집 /안규례 (0) | 2021.1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