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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객 행위
ㅡ장미
김양숙
늑대들의 척추에서 원죄가 익어가는 시간
역전 뒷골목으로 숨어들어 스스로 몸에 불을 밝히는 꽃이 있다
몇 번의 건기를 관통하고서야 몸에 핀 꽃이 가시가 된다는 것을 안 사내
가시에 찔린 사내의 행성은 전신주에 매달려 밤새 별빛을 토해냈다
꽃송이 대신 마른 눈물이 배달되는 시간
몸에 두른 가시를 열면 쏟아지는 새끼손가락들
“머리 올려 줄게 오빠랑 살자”
“오빠랑 도망가자”
설탕과 분자구조가 같은 말이
켜지 못한 촛불이 되어 유리창살 안에 갇혀있는 저녁
짐승의 피를 깨우는 여자의 웃음이 담장 아래로 쌓였다
물컹거리며 제일 먼저 썩어가는 심장은
사내의 식민지와 여자의 식민지가 만나는 지점
여자가 더듬이를 갖다 대고
사내의 속을 읽어 내는 방식을 고집했다
꽃잎은 서서히 낡아가며
열여덟 살의 이력을 한 움큼의 비린내로 뿌렸다
눈물로 정조준 된 사내는 다시 벼랑에서 추락하였다
누군가를 보내고 돌아선 새벽
수명이 다한 피의 비늘들이 떨어져 역전 뒷골목을 구르고
상처에 비린내가 차오르면 장미의 시간에 옹이가 박혔다
헐거워진 창살 사이로 고개를 내민 여자
깨어진 골목 안을 기웃거리는 늑대의 담벼락에
다시 뜨거워진 촉수를 올렸다
스스로의 죄를 창살 밖으로 꺼내 놓고 수선 중인 장미
아직도 사내의 식민지 일까
ㅡ시집『흉터를 사랑이라 부르는 이유』(시와산문문학회,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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