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달력
금시아
1.
감자 씨눈을 잘라내는 어머니의 우기, 흰 눈밭 위로 정월의 발자국 여럿 지나갑니다 후미진 곳간에서 씨감자 후끈해지면 벌써 동쪽을 선점한 어머니는 여름 귀를 열어놓는 습관을 키웁니다 햇살 가득 담고 있는 삼월은 간장 항아리 같은 검은 보습의 달, 밭고랑을 함부로 드나들면 안 됩니다. 발자국에 놀란 씨앗들 제 뿌리로 안절부절 당신을 움켜잡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2.
햇살을 외면할수록 굵고 탐스러운 감자의 절묘한 중력을 방책 삼아 깊은 한숨 뭉클해지면 어머니는 울컥, 오월의 외도를 묵인합니다 유월이면 설움보다 더 하얀 눈물로 어머니를 두텁게 북돋아 주던 하지夏至, 푸른 천둥과 돌 바람에 서러운 감자꽃들 어머니의 못난 이름처럼 창백해지고 짓무르면 시름은 풀 죽어 불쑥불쑥 도드라졌다가도 당신의 우기 배시시 따뜻해지곤 했는데요 가득 찬 달 여위어지면 땅 위의 월력들 출산을 서두릅니다 지난겨울 묻어 두었던 항아리 차가운 물로 헹궈내면 씨줄 날줄로 꼬아진 감자의 획들은 촘촘하거나 듬성듬성한 채 한 해의 따듯한 식량입니다
3.
긴긴 동지의 밤 감자는 객식구 늘어 빈방 하나 차지하듯 비로소 살찌운 곡식들의 좌장이 됩니다 겨우내 쳇바퀴 돌던 어머니의 우기, 짙은 어둠이 키운 굵직굵직한 별 한 바구니 머리에 이고 모래시계처럼 우주를 통과합니다 초롱초롱, 밤하늘의 감자밭 비옥해지는 동안 글썽이는 둥근 월력에서 벗어난 마지막 날의 당신, 어머니! 한 장 남은 달력 북 찢어지고 또 한 해 툭 떨어집니다
ㅡ『시산맥』(2021,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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