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화엄경을 읽다 /김남권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2. 2. 8.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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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을 읽다

 

김남권

 

 

돌아서서 가는 그 사람의 등을 보았다

 

입술의 무늬보다

눈동자의 무늬보다

더 따뜻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완만한 경사로 굽이쳐 내려오는 어깨의 능선 아래로

세월의 무게가 구름처럼 걸려 있었다

 

경추를 지나 요추로 향하는 갈비뼈를 덮고 있는

단단하게 굽은

날개와 날개 사이로 오랫동안

참아온 슬픔이 덮여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수없이 정면으로 마주칠 때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사연들이

어느 날 나를 돌아서 가는 겨울처럼

쓸쓸한 뒷모습을 보다가 알게 되었다

 

그 허전한 등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무늬를,

말보다 깊은 경전을 혼자 써 내려가느라

다 닳아진 어깨를,

 

이순의 강을 혼자 건너오느라

툭, 툭, 불거진 울음주머니가

갈비뼈 마디마다

무디어가는 봉분처럼 숨어 있었다는 것을,

 

고요하게 들썩이며 잠든

그 사람의 등을 한 번 만져 보아라

법정 스님의 법문보다 더 깊은

화엄의 무니가 보일 것이다

 

 

 

―시집『나비가 남긴 밥을 먹다』(詩와에세이,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