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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흰나비의 여행
김남권
서울행 케이티엑스 3호차에
배추흰나비 한 마리 탑승했다
강릉에서 무임승차한 배추흰나비는
당최 내릴 생각이 없다
승무원이 불러도 본체만체,
승객들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뜻 모를 미소를 던진다
3호차가 특실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지도 않다
수영복 차림으로 승차했는지 날개를 펄럭일 때마다
바다냄새가 났다
여름 한낮, 하루 종일 배추밭에 엎드려 지냈던
젊은 날의 어머니는 정작 배추 한 잎 먹어보지도 못한 채
장다리꽃이 다 지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뿌리에 바람이 들고 이파리가 노랗게 물들었지만
씨앗을 보러 오지도 않았다
이미 오십 수년 전의 일이었다
기차가 양수리 철교를 지날 때쯤
배추흰나비는
차창 밖에서 날개에 푸른 물이 든 채로
나를 따라왔다
케이티엑스3호차 객실 가득
배추흰나비들이 몰려와 아직 여물지 않은 어머니의
배추를 뜯어 먹고 있었다
―『시문학』(2021, 2월호)
―시집『나비가 남긴 밥을 먹다』(詩와에세이,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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