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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가 남긴 밥을 먹다
김남권
김치를 담그려고 마트에서 사온 배추를
다듬다가 수세미처럼 줄기만 남은
배추 이파리를 보았다
얼마나 달고 고소했길래 이파리의
뼈대만 남기고 갉아 먹었을까
어두컴컴한 배춧잎 속에서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며 통통하게 살이 올랐을 배추벌레들,
지금쯤 가을 하늘을 날고 있을까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의 날개를 달아준 일이 없지만
오늘 사온 배추 한 포기 속에서 통통하게 살이 올랐을
배추벌레들을 생각하면 가슴속에 등불 하나가 생긴다
배추벌레들이 먹고 남은 것들을 겨우내 몸속에 채워 넣고 나면
내년 봄, 내 몸에도 푸른 날개가 돋아나지 않을까
지상의 마지막 종점에서 도움닫기를 하며 푸른창공을 향해 달려갔을
배추벌레들의 날갯짓, 11월의
푸른 허공에 하얗다
―시집『나비가 남긴 밥을 먹다』(詩와에세이,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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