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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
박정화
쓸쓸함이 빈 배처럼 떠밀려 오는 날
내 창가에 붉은 감잎 하나가
기억 하나를 얹어 놓았다
어둑한 병실에서
휴가 가듯 그가 내 손을 놓았을 때
후르르 떨던 계절이 나보다 먼저 울었다
살아가는 법을 민들레 꽃씨만큼도 모르던 날
친구에게 돈 얘기를 꺼내는 비루함과
치과를 갈 수 없던 가난의 통증 앞에
보고픔은 버려야 할 허영이었다
나만큼의 꽃 한번 피워보지 못한 수치가
고장 난 회로 같이
언제나 가을을 들여 앉혔다
유택이 앉을 산자락에
미리 온 계절이 그늘을 짓는다
묵혀둔 일기장에 묘비명을 썼다 지우는 오늘
사진첩의 흔적들도 먼지처럼 날아가고
서랍 속 내 허물들도
헌옷 수거함으로 버려진다
아직도 내 안에 들어와 휘저어 놓고 가는
너를 만나러 가는 준비를 준비하는 날들
꼭 와야 하는 것처럼
사붓사붓 눈이 올 것 같은 하늘에
기러기 한 마리 꾹꾹 울음을 물고
북녘으로 날아간다
―시집『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로 갈 거야』(문학과사람,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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