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만추 /박정화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2. 3. 22.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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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

 

박정화

 

 

쓸쓸함이 빈 배처럼 떠밀려 오는 날

내 창가에 붉은 감잎 하나가

기억 하나를 얹어 놓았다

 

어둑한 병실에서

휴가 가듯 그가 내 손을 놓았을 때

후르르 떨던 계절이 나보다 먼저 울었다

 

살아가는 법을 민들레 꽃씨만큼도 모르던 날

친구에게 돈 얘기를 꺼내는 비루함과

치과를 갈 수 없던 가난의 통증 앞에

보고픔은 버려야 할 허영이었다

 

나만큼의 꽃 한번 피워보지 못한 수치가

고장 난 회로 같이

언제나 가을을 들여 앉혔다

 

유택이 앉을 산자락에

미리 온 계절이 그늘을 짓는다

 

묵혀둔 일기장에 묘비명을 썼다 지우는 오늘

사진첩의 흔적들도 먼지처럼 날아가고

서랍 속 내 허물들도

헌옷 수거함으로 버려진다

 

아직도 내 안에 들어와 휘저어 놓고 가는

너를 만나러 가는 준비를 준비하는 날들

 

꼭 와야 하는 것처럼

사붓사붓 눈이 올 것 같은 하늘에

기러기 한 마리 꾹꾹 울음을 물고

북녘으로 날아간다

 

 

 

―시집『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로 갈 거야』(문학과사람,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