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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계단을 울먹이며* 오르는 이에게
이정희
무명처럼 하얗게 웃던 모습 떠오릅니다
어느 절 꽃살문에 닿기까지 간절했을 마음
귓바퀴 너머 떨어지던 별똥별
함께 바라봅니다
연골처럼 닳아질 달빛이 어스름한
재개발지구에도 마음이 오래 머무네요
아코나이트엔 눈먼 철자가 숨어 있어요
눈을 감고 듣는 밤새 쩡쩡 우는 얼음 소리
그해 겨울 계곡에서 듣던 아득했던 목소리도 들려
설레고 놀라며 읽었습니다
어디에도 묶이지 않은 광활한 시심,
오랜만의 두근거림으로 이 밤이 평탄치 못 하리라 기뻐합니다
마스크를 벗어 던지는 날
사람 많은 거리에서 영문 없이 울먹,
눈물이 차오를 때
기차를 타고 전망 좋은 출판사에 들러
반품 도서 한 권 받아 오겠습니다
자갈치 시장 좌판에서 회 한 접시 시켜놓고
못 먹는 소주잔을 기울이겠습니다
아주 먼 훗날의 나와
아주 먼 옛날의 내가
서로 마주 앉아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 오겠습니다
*원양희의 『사십 계단, 울먹』을 읽고
―『시와소금』(2022,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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