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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가 밥이다
김권곤
정전이다
전기에너지로 시급을 받고 일하는 전기제품들
일제히 파업에 들어갔다
가공의 세계에 살던 아이스크림 하드가 녹아내리고
냉장고 속에 갇혀 있던 부패가 속도를 낸다
손가락으로 누르면 일을 척척하던
전기밥솥 전자레인지 커피포트
주인 말을 듣는 척도 하지 않는다
지금 일을 하면
시급을 열 배로 올려준다 해도 꿈적도 하지 않는다
아파트 10층에 사는 허리 굽은 노인
기다려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지 않아
힘겹게 계단을 오르더니
전등 보일러 수돗물 화장실이 파업에 동참해
아파트가 냉장고처럼 춥다며
숨을 몰아쉬며 다시 내려온다
전기가 끊긴 순간부터
놀고 있던 빗자루는 일거리가 생겼고
부엌 찬장 속에 갇혀 있던 양은 주전자가 물을 끓인다
구석진 곳에 있던 손들이 일거리를 찾는다
카드 결제로 구입한 전기제품들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관리자일 뿐
보이지 않는 주인이 따로 있었다
―『모던포엠』(2022,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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