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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발자국
이현서
검은 동공 속에 달을 키워본 적 있다
꽃들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직진하고
자진하는 꽃잎들이 빙하기로 숨어드는 계절
어떤 슬픔이 이곳까지 달의 종족을 이끌었을까
불면을 끌어안은 깊고 커다란 창엔
눈썹달이 어둠을 삼키며 둥글게 몸을 말았다
등뼈를 구부려 둥글게 몸을 만다는 것은
마지막 생존을 위한 또 다른 방식
굴욕을 견딘 몸의 언어들이 천천히 눈꺼풀을 닫는 시간
세찬 눈보라를 견디기 위해
서로의 체온으로 둥글게 무리를 짓는 황제팽귄처럼
머리를 조아린 채 고독을 견디는 것이다
하얀 실뿌리를 밀어 올리며 나란히 봄밤을 건너던 날들은
끝내 돌아오지 않겠지만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리는 달빛에 어제보다 깊어진 허공
집요하게 달라붙는 질문들을 어둠처럼 삼키며
이방인처럼 꿈밖을 배회하던 날들이 우수수 쏟아진다
영혼의 떨림처럼 여백을 채우는 천년의 달빛
때 이른 이별
먼 당신이 두고 간 계절 속에
달을 통과하는 슬픔의 붉은 발자국
―웹진『시인광장』(2022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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