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불오백성전' 측면 벽의 '신묘장구대다라니'>
<▲ 천불오백성전>
대웅전의 서쪽에 자리잡은 천불오백성전(千佛五百聖殿)은 오백나한을 모신 전각이다.
건물자체가 높은 단 위에 설치된 데다가 내부에 많은 상(像)을 봉안하고 있어 건물 높
이가 상당하다. 그래서 정면에서 보면 다소 불안정해 보이기도 한다. 문에는 촘촘한 격
자무늬에 엷은 청색이 주된 색상을 이루고 있어 절 건물로는 다소 낯설다.
나한(羅漢)은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성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으
므로 부처나 보살 못지않게 공양을 받을만한 위치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러한 나한
을 모신 건물에는 흔히 ‘오백나한전’ 또는 ‘나한전’, ‘응진전’ 이라는 이름이 붙는데, 이
곳만은 특이하게 천불이 덧붙여져 있다. 그래서 법당에 천불이 모셔져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오백나한상과 관음보살상만 놓여 있다. 건물이름에 천불이 붙어 있는 것은 천
불전과 나한전을 겸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1964년에 조성된 전각으로 대웅전 보다는
약간 작다.
내부에 봉안된 오백나한상은 최기남이 조성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는 1915년 관직
에서 물러나 금강산에 들어가 십팔 나한상과 천불상, 사천왕상 등의 조각에 열중했다.
그리고는 여주 신륵사에 자신이 조성한 조각상등을 봉안했다가 이후 화계사로 옮겨와
최기남의 가족이 천불오백성전을 짓고 모시게 된 것이다.
오백 나한은 경전에 많이 등장한다. 석가모니가 중인도 교살라국 사위성에서 오백나한을
위해 설법을 했다고 하고, 매달 15일 마다 오백나한들을 위한 계를 설하였다고도 한다. 또
석가모니가 열반에 드신 후 중인도 마가다국 칠엽굴에서 오백 나한이 모여 불전을 편찬하
였고, 석가모니 사후 600년이 지난 뒤 인도 서북부의 가습미라에서 열린 제 4결집에 모인
비구의 수가 500이라 오백 나한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처럼 나한은 석가모니 생존 시에 따
르던 500명의 제자를 뜻하기도 하고, 열반하신 뒤에 여러 가지 중요한 일에 모여들었던
500명의 나한이나 비구를 뜻하기도 한다.
아무튼 이들은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에서 특별한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잡아 오늘에 이른
.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조성된 오백 나한의 모습이 다 다르다는 것과 우리 인간들의 모습과
닮아 있고 해학적인 모습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오백나한상 중에는 자신이 아는 사람의 얼
굴을 하나쯤은 찾을 수 있다고 전해진다.
<▲ 천불오백성전 내부 모습>
<▲ 천불오백성전 내부 모습>
<▲ 천불오백성전 내부 모습>
<▲ 삼성각>
불교의 여러 신(神) 중에는 우리나라에서만 믿어오는 신들도 꽤 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산신과 칠성신, 독성신이다. 산신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토속신으로 나이 든 도사의 모습
으로 나타나며 호랑이와 동자를 거느린다.
독성은 남인도 천태산에서 홀로 깨달아 성인이 된 나반존자를 가리킨다.
희고 긴 눈썹을 가진 도인으로 오른 손에는 석장을, 왼손에는 염주 또는 불로초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 세 신은 본래 별도의 건물에 모셔졌다. 산신은 산신각에, 칠성은 칠성각에, 독성은 독성각
에 각각 모셨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세 신을 한꺼번에 모시고 건물 이름도 삼성각이라고
부른다.
화계사의 삼성각은 경내 좌측 언덕에 세워져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75년 진암(眞菴)스님이
세운 것이다.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기와는 동기와를 얹었다. 본래 화계사에는
산신각이 있었는데, 1885년에 금산(錦山)스님이 중수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산신각이 너무 낡아서 1975년에 고쳐 지은 것이 바로 현재의 삼성각 이다.
내부에는 1973년에 조성한 칠성탱화와 독성탱화, 산신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 조성한 칠성탱화와 독성탱화, 산신탱화가 봉안되어 있는 삼성각>
<▲ 조성한 칠성탱화와 독성탱화, 산신탱화가 봉안되어 있는 삼성각>
<▲ 조성한 칠성탱화와 독성탱화, 산신탱화가 봉안되어 있는 삼성각>
<▲ 삼각산 화계사의 대웅전/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 대웅전의 삼존불/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화계사 중심 법당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절 창건 당시 신월 선사가
법당 3처를 지었다고 하는데, 그때에도 대웅전이 있었 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단지 현재의
물은 19세기 후반에 왕실의 도움으로 세워진 것으로, 1870년에 용선(龍善)과 초암(草庵)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이때 시주는 흥선대원군이 하였다.
당대를 호령하던 대원군이 시주자이므로 공사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1870년에 환공이
지은 『화계사대웅보전중건기문』에는 석수 30명, 목공 100명이 달려들어 불과 수개월 만에
완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법 높은 단 위에 세워져 있어 앞마당에서 올려다보면 지붕
의 양쪽이 마치 커다란 새가 날개를 펼친 듯 활력이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고 있는 공포는
장식품으로도 손색이 없다. 특히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설치하였는데, 이렇게 공포를 많이 꾸
며놓은 건축양식을 다포계양식이라고 한다.
문미에는 대웅전 현판이 걸려 있는데, 현판 글씨는 근세의 명필인 몽인 정학교가 쓴 글씨이다.
대웅전 좌우측 벽에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표현한 벽화가 그려져 있으며, 정면 문 하단에는 연
꽃문양이 그려져 있다. 조선 후기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이 대웅전은 건물 전체가 1986년에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65호로 지정되었다. 전각 내부를 들여다보면 본존인 석가모니불을 중심
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이 삼존불은 근래에 조성된 것이다. 뒤에 있는 후불탱화는 1875년에 화산이 조성한 것으로, 주
불은 석가모니불이 아니고 아미타불이다. 아미타불 주변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보현보
살 문수보살 지장보살 등과 사천왕 십대제자 등이 그려져 있다. 대웅전 왼쪽에는 본래 관음전이
있었는데, 1974년에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관음전 역시 창건 초기부터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단지 관음전에는 자수관음상이라는 특이한 유물이 전해져왔다. 이 자수관음상은 1875년
에 왕실에서 내린 것으로, 이 상을 봉안하기 위해 1876년에 초암이 관음전을 중수한 바 있다.
<▲ 화계사 명부전>
저승의 명부를 상징하는 불전을 말한다. 죽은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원해 주고자 대원력을 세우신
보살로 알려진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신 곳이며,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한다. 또한 저승의 심
판관인 시왕을 모신 곳이라고 하여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부른다.
지장보살은 도리천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의 부촉을 받고 매일 새벽 항하사의 정에 들어 중생의 갖가
지 근기를 관찰하고 이불의 중간인 무불 세계에 육도중생을 교화하는 대비보살이다. 육도의 모든
중생이 성불하기 전에는 자신도 성불하는 것을 연기하고 보살로 머무르면서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지장보살은 정해진 업도 모두 소멸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죄를 짓고 고통 받는
중생이 일심으로 귀의하여 해탈을 구하면 악도를 벗어나 구제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지장보살을 범
어로는 크시티가르바라고 한다. 대지를 모태로 한다는 뜻이다. 생명을 낳고 기르는 대지와 같은 능
력을 가진 보살을 상징한 것이다.
화계사 명부전은 명부(冥府)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꾸며놓은 전각이다. 명부란 지옥을 뜻하는데 지
옥의 모습을 그대로 꾸며 놓은 곳은 아니고, 죄인들을 심판하는 법정과 비슷하다. 한가운데에 지장
보살이 판사처럼 앉아있고 주변에는 시왕들이 검사처럼 날카로운 눈매로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지장보살을 돕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시왕을 돕는 동자, 판관과 녹사, 신장 등이 실내 앞면을 가
득 메운다. 한쪽에는 생전에 저지른 죄를 비춰볼 수 있는 업경대가 설치되어 있다. 업경대로 죽은
사람의 죄를 비춰보고 시왕들이 문초를 하며, 그 결과에 따라 극락이든 지옥이든 어디론가 망자를
보내는 곳이다. 망자는 죽은 지 49일째가 되는 날에 어디론가 가게 되는 까닭에 후손들은 이날 특
별히 정성을 다해 불공을 올린다. 죽은 이가 좀 더 좋은 곳으로 갈수 있도록 비는 것이다. 이 의식
을 49재라 한다. 명부전은 바로 49재를 치르는 곳이다.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조상이 좋은
곳으로 가기를 바라며 49재를 지내곤 하는데, 이것은 우리 민족이 효를 인간의 가장 중요한 도리로
여기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어느 절이든 명부전은 쉽게 발견할 수 있은 전각이다.
화계사 명부전인 현재의 건물은 1878년 새로 지은 것이다. 당시 화계사는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던 절로서 왕명으로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옮겨 모시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황해도 배천의 강서사에 있던 지장보살과 시왕상이 선정되어 이곳 화계사로 모시게
되었다. 이때 이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봉안하기 위하여 초암스님이 조대비(趙大妃)의 시주를 받아
명부전을 건립하게 된 것이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2001년에 기와를 바꿔 얹고 벽도 채색해 새 건물
같다. 현판과 주련은 흥선대원군의 친필 그대로이고, 추사 김정희의 제자답게 추사체의 특징을 과
시하고 있다. 내부역시 2001년에 새로 꾸며 지장보살상은 물론 각종 시왕상, 동자상등이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하지만 지장보살의 후불탱화는 1878년에 조성된 그대로이다. 최근 개금불사를 위
해 지장보살의 복장을 열어보니 1649년(인조27)에 강서사에서 제작했다는 발원문이 나와 조성시
기가 밝혀졌다. 발원문과 함께 여러 가지 책의 불경과 불사리도 나왔다.
지장보살상은 전체적으로 강건한 기상이 엿보인다. 얼굴은 둥그렇지만 눈매가 길고 콧마루가 우뚝
하며, 굳게 다문 입은 용맹스러움이 배어 있다. 설법인을 짓고 잇는 손매도 탐스럽고 탄력이 있으며
어께선도 부드러우며 풍부하다. 무릎은 전후좌우의 길이와 폭이 알맞은 비래를 갖추면서 넉넉한 두
께를 유지하여 안정감을 준다. 불의는 상당히 두껍게 표현하여 매우 사실적이다.
좌우에 시립해 있는 도명존자상과 무독귀왕상은 물론 시왕. 판관. 동자. 사자. 수문장상도 모두 지장
보살과 같은 양식기법으로 제작되었다. 판관의 사모나 시왕의 의관 또한 이 시대의 의제(衣制)를 가
늠할 수 있을 만큼 사실적이다. 이렇듯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은 당시를 대표할 수 있는 미술사적 의미
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복장 유물까지 온전하게 나와 불교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대웅전 앞과 명부전 앞에는 놋 항아리(청동)가 있는데, 이것은 홍대비(1904)가 내린 놋물드므(유수옹)
1벌이다. 전각이 나무로 지어져 불나면 끝장이라 소방용으로 놓아 둔 것이다. 이러한 놋항아리-물드므
는 창덕궁의 인정전(仁政殿, 1804), 선정전(宣政殿, 1647), 대조전(大造殿, 1888) 것과 같아서 눈뜨게 한
다. 곧, 궁의 것이 궁절에도 (옮아)간 것임을 보여주는 것! 창경궁 명정전(昌慶宮 明政殿, 1616)에도 두고
있다(1벌). 인정전과 대조전은 2벌(4점).
<▲ 명부전 내부/좌우에 시립해 있는 도명존자상과 무독귀왕상>
<▲ 시왕. 판관. 동자. 사자. 수문장상>
<▲ 시왕. 판관. 동자. 사자. 수문장상>
<▲ 시왕. 판관. 동자. 사자. 수문장상>
<▲ 천불오백성전과 대웅전, 명부전>
<▲ 대웅전, 명부전>
<▲ 천불오백성전과 대웅전, 중앙에 작게 보이는 전각이 삼성각>09.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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