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것들은 살아온 날을 묻지 않는다/김용인
햇빛에 나를 널어 말린다
달빛에 나를 널어 말린다
비가 내리면 비를 맞는다
눈이 내리면 눈을 맞는다
등받이 달아난 의자가 입구를 지키고 있다
뽀오얀 시간 한꺼풀 뒤덮여 있다
이따금 풀벌레가 앉았다 간다
발목 근처엔 소름소름 검거나 푸른 버섯이 돋았다
놀라지 마라 나도 한때는 꽃이었다
하루종일 침묵을 상영중인 TV
바람소리를 연주하는 줄 끊어진 기타
비로소 속도의 마법에서 풀려나
가슴 한가운데 해바라기를 키우는 폐타이어
서랍을 활짝 열어젖힌 채
문갑은 이제 화려한 비상을 꿈꾸고 있다
버려진 것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
소음조차 에돌아 가는 곳
우물속 같은 고요가 마을을 감싸고 있다
살아온 날들을 묻지 않는 건 이곳의 불문율이다
숨가뿐 날은 모두 나를 통과해 갔다
지금 나는 잊혀지기 위해 있다
어렴풋이 만져지는 부재의 씨방
흙속에 다리를 묻고 기다린다
그것이 죽음이라 해도 괘념치 않는다
(시문학 2008. 7 신인우수작품상)
2010-07-16 / 19시 08분
텔레비전/최승호
하늘이라는 무한(無限) 화면에는
구름의 드라마,
늘 실시간으로 생방송으로 진행되네
연출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수줍은지
모습 드러내지 않네
지난 여름의 주인공은
태풍 루사가 아니었을까
루사는 비석과 무덤들을 넘어뜨렸고
오랜만에 뼈들은 진흙더미에서 해방되어
강물로 뛰어들었네
기를 쓰며 울어대던 말매미들이
모두 입적한 가을
붉은 단풍이 고산지대로부터 내려오고
나무들은 벌거벗을 준비를 하네
그들은 어느 산등성이를 걷고 있을까
툭 트인 암자 툇마루에서 쉬고 있을까
나는 천성이 게으르고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인지
산 좋아하는 이들을 마지못해 따라나서도
계곡에서 그냥 혼자 어슬렁거리고 싶네
누가 참 염치도 없이 내다버렸네
껍데기만 남은 텔레비전이
무슨 면목없는 삐딱한 영정처럼
바위투성이 개울 한 구석에 처박혀 있네
텅 빈 텔레비전에서는
쉬임없이
서늘한 가을물이 흘러내리네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 열림원. 2003)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09)
2010-06-14 / 23시 12분
풀밭 뉴스/복효근
산길 걷다보니
낡은 TV하나 반쯤 누운 채
버려져 있다
강아지풀 명아주
쑥부쟁이 모여서들
갸웃갸웃 브라운관에 저를 비춰본다
전원이 없어도
안테나가 없어도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날씨는 쾌청
풀들의 무도회엔 인기척만이 두렵다
지금은 일요일 정오
뉴스가 있을 시간
누가 켤세라 누가 끌세라
개구리 한 마리
전원 버튼 위에 앉아 버티고 있다
<내일을 여는 작가> 2009년 겨울호
2010-07-29 / 22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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