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 608/김영승
어릴 적의 어느 여름날
우연히 잡은 풍뎅이 껍질엔
못으로 긁힌 듯한
깊은 상처의 아문 자국이 있었다
징그러워서
나는 그 풍뎅이를 놓아주었다.
나는 이제
만신창이가 된 인간
그리하여 主는
나를 놓아주신다.
(『반성』. 민음사. 1987)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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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 743/김영승
키 작은 선풍기 그 건반 같은 하얀 스위치를
나는 그냥 발로 눌러 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선풍기의 자존심을 무척 상하게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나는 선풍기한테 미안했고
괴로웠다
―너무나 착한 짐승의 앞이빨 같은
무릎 위에 놓인 가지런한 손 같은
형이 사다준
예쁜 소녀 같은 선풍기가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
어린이 동화극에 나오는 착한 소녀 인형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아저씨 왜 그래요' '더우세요'
눈물겹도록 착하게 애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얼 도와줄 게 있다고 왼쪽엔
타이머까지 달고
좌우로 고개를 흔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더운 여름
반 지하의 내 방
그 잠수함을 움직이는 스크류는
선풍기
신축 교회 현장 그 공사판에서 그 머릿기름 바른 목사는
우리들 코에다 대고
까만 구두코로 이것저것 가리키며
지시하고 있었다
선풍기를 발로 끄지 말자
공손하게 엎드려 두 손으로 끄자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을 닮았다
핵무기도 십자가도
콘돔도
이 비 오는 밤
열심히 공갈빵을 굽는 아저씨의
그 공갈빵 기계도.
(『반성』. 민음사. 1987)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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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에서/김영승
작은 새 한 마리가 또 내 곁을 떠났다.
나는 그 새가 앉았던 빈 가지에
날아가버린 그 새를 앉혀놓았다.
많은 사람이 내 곁을 떠났다.
떠나간 사람
죽은 사람
나는 아직도 그들이 앉았던 빈자리에
그들을 앉혀놓고 있다.
그들이 없는 텅 빈 거리를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말없이 걷는다
거리는 조용하지만
떠들썩하다.
그들이 웃으며 나를 부르고 있다.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 곁을
내가 떠나게 되었을 때
내가 없는 술집 그 구석진 자리에
나를 앉혀놓을 수 잇는 사람이 있을까.
작은 새 한 마리가
아직도 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다.
(『아름다운 폐인』. 미학사. 1991)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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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폐인/김영승
나는 폐인입니다
세상이 아직 좋아서
나 같은 놈을 살게 내버려 둡니다
착하디착한 나는
오히려 너무나 뛰어나기에 못 미치는 나를
그 놀랍도록 아름다운 나를
그리하여 온통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나를
살아가게 합니다
나는 늘 아름답습니다
자신 있게 나는 늘 아름답습니다
그러기에 슬픈 사람일 뿐이지만
그렇지만 나는 갖다 버려도
주워갈 사람 없는 폐인입니다.
(『아름다운 폐인』. 미학사. 1991)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07)
2010-07-15 / 낮 12시 45분
작풍 세계
김영승은 지적 성찰을 통해 일상의 현실과 욕망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야유를 감행함으로써 현대문명의 가치관과 자본주의의 질서를 교란하고 전복하는 '해체시'의 대표 주자로 평가되어 왔다. 물질의 풍요가 정신의 결핍을 초래하는, 그리하여 생의 가치가 전도(顚倒)되어버린 현실이 문명과 자본주의가 초래한 삶의 증거라는 사실을 '반성'하기 위하여 그는 가차 없는 시선과 언어를 부려왔다. 첫 시집 『반성』에는 무기력한 일상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진실을 탐침해내는 지적 통찰력이 위악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해체시'의 전략을 이용하여 비속한 일상어와 산문적 진술이나 요설을 과감하게 도입함으로써 자본주의에 길들여져 있는 일상을 야유하거나 풍자하는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시집에서 '반성'의 대상은 무기력한 일상을 영위하는 시인 자신을 시발점으로 하여 사회 전체로 확대된다. 세번째 시집 『취객의 꿈』에 이르면 삶의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은 순정하고 따뜻한 사랑의 시선으로 바뀌고 동원되는 언어의 특성도 비속한 야유와 요설로부터 순화되고 절제된 모습으로 변화된다. 그것은 비속한 현실로부터 자연의 순연함으로 나아가는 시선과도 연계되어 있다. 이 시집에서 현실에 대한 그의 시선은 자학에 가까울 만큼 무기력한 일상의 세부를 해부하고, 그렇게 해부된 풍경에 절망하는 자아의 '권태'를 들추어내는 일에 분주하다. 위악적인 관능과 슬픔은 그러한 자학, 혹은 '권태'의 분비물이다. 시집 『무소유보다 더 찬란한 극빈』에는 가족의 가난에 대한 연민과 자책이 절실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러한 연민과 자책이 죽음의 세계를 넘보게 만든다. 그의 “야윈 알몸을, 휘감는”(「옷」'상복'의 이미지가 그러한 세계로 시인의 자아를 인도한다.
수록작품 해설
「반성 608」에는 일상의 사소한 체험 속에서 존재의 깊은 이치를 길어올리는 지적 통찰력이 표현되어 있다. 생의 “깊은 상처”를 가진 존재로 태어난 운명이 자유의 조건을 만들어 낸다는 실존적 깨달음 속에 가난과 고독을 견디어내려는 시인의 의지가 담겨 있다. “만신창이가 된 인간//그리하여 主는 나를 놓아주신다”에서 가난과 고독을 자유의 가능성으로 돌려놓는 가열한 의지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반성 743」에는 일상의 습관과 편견을 전복시켜 가려진 진실을 들추어내는 날카로운 시선이 실어 나르는 아이러니와 유머가 표현되어 있다. '선풍기'를“발로 눌러”끄는 습관 속에서 “까만 구두코로 이것저것 가리키며/지시하”는 인간의 지배 욕구를 찾아내는 시선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인간이 만든 물건들과 상징 속에서 인간의 속성을 찾아내는 시선도 그렇다
「숲 속에서」에는 존재의 절대 고독 조건이 표현되어 있다. 이별과 죽음이 존재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을 지워버리는 현실이 “새가 앉았던 빈 가지와”“내가 없는 술집 그 구석진 자리”의 모습으로 그려지면서 소멸에 대한 슬픔과 고통을 절실히 환기시켜준다.
「아름다운 폐인」에는 비속한 현실 조건에 적응하지 못하는 존재의 가치가 역설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존재의 가치는 세상과의 불화로 “놀랍도록 아름다운 나”와 “주어갈 사람 없는 폐인”이라는 역설 사이에서 성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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