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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장석주-밥/황규관-긍정적인 밥/함민복-밥은 모든 밥상에 놓인 게 아니란다/고정희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0. 7. 26.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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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귀 떨어진 개다리 소반 위에
밥 한 그릇 받아놓고 생각한다.
사람은 왜 밥을 먹는가.
살려고 먹는다면 왜 사는가.
한 그릇의 더운 밥을 먹기 위하여
나는 몇 번이나 죄를 짓고
몇 번이나 자신을 속였는가.
밥 한 그릇의 사슬에 매달려 있는 목숨
나는 굽히고 싶지 않은 머리를 조아리고
마음에 없는 말을 지껄이고
가고 싶지 않은 곳에 발을 들여 놓고
잡고 싶지 않은 손을 잡고
정작 해야 할 말을 숨겼으며
가고 싶은 곳을 가지 못했으며
잡고 싶은 손을 잡지 못했다.
나는 왜 밥을 먹는가, 오늘
다시 생각하며 내가 마땅히
했어야 할 양심의 말들을
파기하고 또는 목구멍 속에 가두고
그 대가로 받았던 몇 번의 끼니에 대하여
부끄러워 한다. 밥 한 그릇 앞에 놓고, 아아
나는 가롯 유다가 되지 않기 위하여
기도한다. 밥 한 그릇에
나를 팔지 않기 위하여.

 

 

 -「어둠에 바친다. 청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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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

 


이게 다 밥 때문이다.
이런 핑계는 우리가 왜소해졌기 때문
수령 500년 된 느티나무 아래서
참 맑은 하늘을 보며
해방이란 폭발인지 초월인지, 아니면 망각인지
내가 내 맥을 짚어보았다
웃고 울고 사랑하고
그리운 동무에게 편지를 쓰는 시간이
우리를 영영 떠날지도 모르지만
아들아, 밥은 그냥 뜨거운 거다
더럽거나 존엄하거나 유상이든 무상이든
밥을 뜰 때 다른 시간이
우리의 몸이 되는 것
정신도 영혼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이게 다 밥 때문이다
더 먹어라, 벌써 비운 그릇에
한 숟가락 덜어주는 건
연민이나 희생이 아니다
밥은 사유재산이 아니니
내 몸을 푹 떠서 네 앞에 놓을 뿐
밥을 먹었으면 밥이 될 줄도 알아야지
나무 아래서 걸어 나오니
아직도 지평선이 붉게 젖어 있다

 

 

-시집『태풍을 기다리는 시간』(실천문학,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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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석


 

밥이란 말처럼 단호한 말은 없다
한번 말을 뱉으면 입을 꼭 다물어야 한다
입을 벌려 말을 하면 밥이란 말은 밖으로 다 새어나간다
입에서 새어나간 것은 밥이 되지 않으므로
공손히 입술을 다물어야 밥이란 뜻이 완성된다


밥을 먹을 때는 밥이란 말을 하듯 공손히 먹어야 한다
고기처럼 이빨로 뜯어 먹어서도 안 되고
물을 마시듯 꿀꺽꿀꺽 삼켜서도 안 된다
살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밥을 잘 먹는 일이다
밥 속에 삶의 브레이크가 있기 때문이다

 

 

 

-시집『고래발자국』(2009, 종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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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석

 

 

바―압하고 말해보라

톱니처럼 어금니가 꽉 물릴 것이다

어금니 사이로

'밥'하고 말할 때마다 물이 고인다

고인 물은 밥알이 으깨져 나오는 것처럼 끈적하다

밥은,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으깨져

허기진 배를 채워준다

'밥'하고 말하는 순간, 입 안에 차려지는 소박한 밥상

어미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듯

먹고 먹어도 젖꼭지를 내미는, 그 한없는 모성애

'밥'하고 말할 때마다 제 몸을 으깨는 밥알

소리 없이 자신을 으깨는 것

가슴에 눈물이 고이는 것은

수 없는 그리움이 밥알처럼 으깨지기 때문이다

 

 

 

―시집『그때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문학의전당,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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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혜

 

 

밥은 먹었느냐
사람에게 이처럼 따뜻한 말 또 있는가

밥에도 온기와 냉기가 있다는 것
밥은 먹었느냐 라는 말에 얼음장 풀리는 소리
팍팍한 영혼에 끓어 넘치는 흰 밥물처럼 퍼지는 훈기

배곯아 굶어죽는 사람들이
이 세상 어느 죽음보다도 가장 서럽고 처절하다는 거
나 어릴 때 밥 굶어 하늘 노랗게 가물거릴 때 알았다
오만한 권력과 완장 같은 명예도 아니고 오직
누군가의 단 한 끼 따뜻한 밥 같은 사람 되어야 한다는 거

무엇보다 이 지상에서 가장 극악무도한 것은
인두겁 쓴 강자가 약자의 밥그릇 무참히 빼앗아 먹는 것이다

먹기 위해 사는 것과 살기 위해 먹는 것은 둘 다 옳다
목숨들에게 가장 신성한 의식인
밥 먹기에 대해 누가 이렇다 할 운을 뗄 것인가

공원 한 귀퉁이, 우두커니 앉아있는 이에게도
연못가 거닐다 생각난 듯 솟구치는 청둥오리에게도
문득 새까만 눈 마주친 다람쥐에게도 나는 묻는다

오늘
밥들은 먹었느냐

 

 

 

-계간 『다층』(2008,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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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기

 


밥이 되기 싫어
제 밥 찾아
밥 걱정했더니
오히려 밥이 되란다


어무이요
이게 아입니더


우리 엄마 날 배고
꽁당보리밥 잡수시며
제 새끼 잘 먹이려
밥 걱정하던 때가
엊거제 같은데
나는 벌써
이렇게 커서
날이면 날마다
밥 걱정해 가며
제 밥 노릇에
즐거운 비명이다
님은 이미 밥 걱정을 잊은 채
어이어이 꽃상여 타고
저승길로 여행 떠나시고
세상 밥이라곤 모르는
여유를 가지셨다


그런데
어무이요
그게 아입니더


예나 지금이나
그 놈의 밥 때문에
태어나고 죽어가고
힘주고 약해지고
뻐기고 위축되고
훔쳐먹고 뱉어내고
부르고 고프고
풀리고 갇히고
즐겁고 슬프고
기쁘고 안타까웠지
태초에 하늘이 열린 이래
세상에 존재하는 밥치고
어느 것 하나 공평한게 없었다
가끔 현자가 나타나서
태평세월이 엮어질 때면
세상 밥은 그나마 제구실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어무이요
밥 잘 다스리면
내 배, 네 배, 동네 배
고장 배, 사회 배, 나라 배
모두 평안하다 하셧지요


어무이요
그런데
그게 아이라예
내려다 보실 시간 있으시거든
한번쯤 내려다 보이소
마, 우스워요
세세처처 밥 때문에
일 안 벌어지는 곳
어디 있능교


사업주와 노동자의 갈등
국회의원과 선거구민의 갈등
교육관료와 교사의 갈등
정부와 국민의 뿌리깊은 갈등
폭력배들의 이권 다툼의 갈등
버스기사와 승객의 갈등
교통순경과 운전자의 갈등
사는 자와 파는 자의 갈등
주는 자와 받는 자의 갈등
가진 자와 가난한 자의 갈등
종교단체와 신자의 갈등
의사와 환자의 갈등
교사와 학생의 갈등
집주인과 세든자의 갈등
주인여자와 파출부의 갈등
부부 애정의 갈등
부모 형제 간의 갈등
등등
아이고 어지럽고 번거로워라
이 많은 일들을
어찌 다 열거할 수 있을까
밥이 제 밥이 아니거든
밥이 될 짓이나 말아야지
밥이 되도록 엮지도 말아야지


세월마다
가진 자, 누린 자, 있는 자들은
밥들이 언제나
밥통 속에 있기를
가만히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그들의 속성임을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세상에서의 안주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그들에게
밥은 최대의 도구임에 틀림없다


밥 때문에 협잡하고
밥 때문에 작당하고
밥 때문에 비리 만들고
밥 때문에 이중장부 만들고
밥 때문에 비밀수수료 주고받고
밥 때문에 눈알 부라리고
밥 때문에 고성이 오고가고
밥 때문에 만사 주눅 든다


밥아,밥아, 밥 먹어라
그래,그래, 먹을께
주는 밥이나 먹어라
어디 어디 있는고
내 손바닥에 있다
어르고 달래고 주물러
건데기는 빼놓고
남은 찌꺼기 쪼개어
큰소리치며 주는 밥이다
고개 숙여 받아라
황공무지로소이다


어무이요
그래도 우리 밥장사 할 때는
밥다운 밥 만들어 팔았었지요
식사 때면 삼삼오오 몰려와서
맛있다고 게걸스레 먹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밥 앞에 놓고
밥 걱정하던 사람
어디 있덩교
밥다운 밥 만들어 놓으면
그 정성 보고 몰려와서는
맛 한입, 정성 한입, 인심 한입에
시간 가는 줄 몰랐지요
요새는 안그렇심더
밥 앞에 놓고
밥 투정이 예사라예


흥부는 밥 때문에
자존심 조차 버리고
밥주걱에 뺨 맞아가며
밥풀데기라도 구걸하지만
천심이 발동하여
밥 걱정 없는 부자 되게 했네
그래도 내내 베풀고 살았지
현자다운 면모가 여기 있었군


밥을 떡 주무르듯하던 사람도
밥줄 떨어지더니 풀이 죽어
옴짝달싹 못하고 숨죽여 살던데
밥 죽이길 좋아하던 '네로'도
불 밥이 되던데
힘 밥 좋아하던 혁명가도
결국엔 총알 밥이 되던데
밥 좋아 밥 등쳐먹다
배탈난 자 얼마나 많노
제 밥 찾겠다고 법 좋아하던 자
간교한 술수나 쓰더니
그 덜미에 혼이 나더구나


아서라 말어라
내 밥이고 네 밥이고
먹을 만큼 먹고
가질 만큼 가지고
베풀 만큼 나누어라
더도 멀고 덜도 말고
욕심부리지 말고 허세 부리지 말고
빈 손 나그네로 왔다가
빈 손 나그네로 돌아가는
무심(無心)보살이나 되거라


비정한 세월아, 욕말어라
부정한 밥 챙겼거던
부정한 방법으로 건네주고
떳떳한 밥 챙겼거던
터놓고 베풀거라
무리무리 까마귀 무리
시궁창에 머리부터 박고
무리무리 백로무리
명경지수에 목욕한다
뿌린 만큼 거두고
심은 만큼 거두리니
세월아, 무정한 세월아, 걱정말어라


사바세상 사람들아!
밥을 사랑하세
아낌없이 사랑하세
제 밥 구실 제대로 하며
밥 사랑, 생명 사랑
열렬히 구하세
밥이 돠라거든 눈을 밝히고
밥이 되라거든 마음을 열고
밥이 돠라거든 바른 말 토하고
밥이 되라거든 거짓 꼬라지 벗어던지고
밥이 되라거든 분연히 일어나세
밥다운 밥 먹을 시간 꿈꿔 가게요
밥다운 밥 먹을 나날 밝혀가게요
밥다운 밥 먹을 세월 엮어 가게요


어무이요
요새
밥 맛은 어떵교

 

 

 

-시집『또 다른 나를 찾아서』(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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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인 밥

 

함민복

 

 

 

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시집『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창비,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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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과자본주의

 

밥은 모든 밥상에 놓인 게 아니란다

                                     

고정희

 

아침이 찬란하게 빨래줄에 걸려 있구나
한국산 범패 소리가 너도밤나무 숲을
멱감기는 골짜기쯤에서 우리는
너도밤나무 잎사귀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둥그런 밥상 앞에 둘러 앉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쌀밥 옆에
김치, 들깻잎, 오이무침이 아직 푸르다
멀고먼 바다에서 건져 올린 왕새우 요리가
붉을 빛을 내며 접시 위에 엎드려 있다
아이야 너는 기쁨의 탄성을 지르며
쌀밥보다 먼저 왕새우 요리에 손이 가고
밥 대신 햄버거, 숭늉 대신 코카콜라를 찾는구나
왕새우 요리가 밥상 위에 올려지기까지
주부들이 흘린 땀방울과
이 쌀밥 한 접시에 서려 있는
보다 많는 사람들의 곡절은 몰라도 되는구나
되도록 녹말은 조금만
담백질은 많이많이 섭취하는 아이야
네 웃음소리를 스스로 낮추련?

밥은 모든 밥상에 놓인 게 아니란다
네가 햄버거를 선택하고
왕새우 요리를 즐기기까지 이 흰
쌀밥은 애초부터 공평하지 않았구나
너는 이제 알아야 한다
밥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것이란다
네가 밥을 함께 나눌 친구를 갖지 못했다면
누군가는 지금 밥그릇이 비어 있단다
네가 함께 웃을 친구를 아직 갖지 않았다면
누군가는 지금 울고 있는 거란다
이 밥그릇 속에 이 밥 한 그릇 속에
이 세상 모든 슬픔의 비밀이 들어 있단다
우리가 밥상 앞에 겸손히 고개 숙이는 것은
배부름보다 먼저 이 세상 절반의
밥그릇이 비어 있기 때문이란다
하늘은 어디서나 푸르구나 그러나
밥은 모든 밥상에 놓인 게 아니란다
네 웃음소리를 스스로 낯추련?

 


 

 

-고정희 유고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창비,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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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을 가며

 

황규관

 


다시 이력서를 써서
서울을 떠날 때마다 추레해진
사진도 붙이고, 맘에도 없는
기회를 주신다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로 끝나는 자기 소개서를 덧붙여
우체국을 간다
컴퓨터로 찍힌 월급명세서를 받으며 느낀 참담함이 싫어
얼빠진 노동조합이나
제 밥줄에 목맨 회사 간부들과 싸우는 것이
마치 아귀다툼 같아서 떠나온 곳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다
밥 때문에
삐쩍 마른 자식놈 눈빛 때문에
이렇게 내 영혼을 팔려는 짓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왜 그럴까, 알고 싶지가 않다
나는 이렇게 늘 패배하며 산다
조금만 더 가면 여기서 한 발짝만 더 가면
금빛 들판에서
비뚤어진 허수아비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것마저 내게는 욕심이었다
이력서를 부치러 우체국을 간다
한때 밤새워 쓴 편지를 부치던 곳에
생(生)의 서랍을 샅샅이 뒤져
1987년 포항공고 졸업 1991년 육군만기제대
이따위 먼지까지 탈탈 털어서 간다.

 

 

 

 -시집『패배는 나의 힘』.창비.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