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여섯시/엄원태
1
네가 한 풍경을 바꾸는 동안
나는 액자 속과 탁자에도 있었고
걸레 빤 물과 먼지들 속에도 있었다
하루가 제 얼굴을 비비는 시간,
봄 들녘, 타오르던 아지랑이 하마 저물어 식고
놀던 동네 아이들, 배고파 앞이 캄캄해지는 시간
강변마을 해사한 흰 꽃들이
조용히 입 다무는 때
저녁 여섯시가 내게도 와주다니!
나 뒤늦게 행복해도 되는가, 내 안에 너는
고요하고 지극하게 들끓는다
2
갯버들 보드라운 솜털에 입맞추며
저녁의 안부를 묻는다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마음이란 것
너도 갖고 있었구나
아, 눈물겨운 것아
벚꽃 천지에서의 화사한 하루,
봄날의 나른한 비애로 얼룩진 꽃구름 아래
평화는 적막하여서야 비로소 내 것이구나,
삶의 신자 되지 않는 것 없구나!
3
서쪽 하늘 비껴가는 흰 죽지 새 한 마리가
'크나큰 긍정'을 가르쳐준다
슬픔 없는 존재란 없는 것이라고……
저녁 여섯시는 흐린 하늘에도 길 있음을 보여준다
4
산비둘기가 가장 슬픔 족속이다
비 맞는 숲의 오래된 적막을
낮고 구슬픈 흐느낌으로 깨뜨린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는 게
슬픔에도 힘줄이 있다면 그러하리라
꿩 울음소리에 깊은 숲의 울림이 깃들었다
그 울림의 심연을 여섯시가 지나간다
-시집『물방울 무덤』(창비, 2007)
----------------------------------
저녁 6시/이재무
저녁이 오면 도시는 냄새의 감옥이 된다
인사동이나 청진동, 충무로, 신림동,
청량리, 영등포 역전이나 신촌 뒷골목
저녁의 통로를 걸어가보라
떼지어 몰려오고 떼지어 몰려가는
냄새의 폭주족
그들의 성정 몹시 사나워서
날선 입과 손톱으로
행인의 얼굴 할퀴고 공복을 차고
목덜미 물었다 뱉는다
냄새는 홀로 있을 때 은근하여
향기도 맛도 그윽해지는 것을,
냄새가 냄새를 만나 집단으로 몰려다니다보면
때로 치명적인 독
저녁 6시, 나는 마비된 감각으로
냄새의 숲 사이 비틀비틀 걸어간다
-시집「저녁 6시」(창비, 2007)
*이재무 시집(저녁 6시)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를 않는다.
인터넷에서 검색을 하니 11행부터 조금 다르게 되어 있어 문학지에 발표한 시와 시집을 내면서 수정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어쨌든 시집을 찾을 때까지 아래에 적어둔다.
냄새는 홀로 있을 때 은근하여 향기가 높고
맛도 그윽해지는 것을, 냄새가 냄새를 만나
집단으로 몰려다니다 보면 그것들은 때로
흉기가 되고 치명적 독이 되기도 한다
저녁 6시, 나는 범죄의 충동 가까스로 견디며
울긋불긋 냄새의 숲 비틀비틀 걸어간다
2011-03-25일 시집에서 확인.
시집의 내용이 맞음.
------------------------------
비 내리는 오후 세 시/박제영
그리움이란
마음 한 켠이 새고 있다는 것이니
빗 속에 누군가 그립다면
마음 한 둑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니
비가 내린다, 그대 부디, 조심하기를
심하게 젖으면, 젖어들면, 허물어지는 법이니
비 내리는 오후 세 시
마침내 무너진 당신, 견인되고 있는 당신
한 대는 '나' 이기도 했던 당신
떠나보낸 줄 알았는데
비가 내리는 오후 세 시
나를 견인하고 있는 당신
-『뜻밖에』 (애지, 2008)
-------------------------------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도종환
산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 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고,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 시에서 한 시 사이는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머지않아 겨울이 올 것이다 그때는 지구 북쪽 끝의 얼음이 녹아 가까운 바닷가 마을까지 얼음조각을 흘려보내는 날이 오리라 한다 그때도 숲은 내 저믄 육신과 그림자를 내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지난봄과 여름 내가 굴참나무와 다람쥐와 아이들과 제비꽃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보낸 시간이 얼마나 험했는지 꽃과 나무들이 알고 있으므로 대지가 고요한 손을 들어 증거해 줄 것이다
아직도 내게는 몇 시간이 남아 있다
지금은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아직도 내게는 몇 시간이 남아 있다
지금은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시집『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창비, 2011)
'<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 > 모음 시♠비교 시♠같은 제목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빔밥/고운기-시 비빔밥/김금용 (0) | 2010.07.27 |
---|---|
밥/장석주-밥/황규관-긍정적인 밥/함민복-밥은 모든 밥상에 놓인 게 아니란다/고정희 (0) | 2010.07.26 |
반성 608-반성 743-숲 속에서-아름다운 폐인/김영승 (0) | 2010.07.17 |
버려진 것들은 살아온 날을 묻지 않는다/김용인-텔레비전/최승호 (0) | 2010.07.16 |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손택수,박문혁,유하,진은영/김연진(동화) (0) | 2010.07.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