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오독
임영조
장마걷힌 칠월 땡볕에
지렁이가 슬슬 세상을 잰다
시멘트 길을 온몸으로 긴 자국
행서도 아니도 예서도 아닌
초서체로 갈겨 쓴 일대기 같다
한평생 초야에 숨어 굴린 화두를
최후로 남긴 한 행 절명시 같다
그 판독이 어려운 일필휘지를
촉새 몇 마리 따라가며 읽는다
혀 짧은 부리고 쿡쿡 쪼아 맛본다
제멋대로 재잘대는 화려한 오독
각설이 지렁이의 몸보다 길다
오죽 답답하고 지루했으면
隱者가 몸소 나와 배밀이 하랴
쉬파리 떼 성가진 무더위에
벌겋게 달아오늘 肉頭文字로.
-『시인의 모자』(창비,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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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일(吉日)
이수익
보도블록 위에
지렁이 한 마리 꼼짝없이
죽어 있다.
그곳이 닿아야 할 제 생애 마지막 지점이라는 듯.
물기 빠진 수축된 환절(環節)이 햇빛 속에 드러나
누워 있음이 문득 지워진 어제처럼
편안하다.
부드럽고 향기로운 흙의 집 떨치고 나와
온몸을 밀어 여기까지 온 장엄한 고행이
이 길에서 비로소 해탈을 이루었는가,
금빛 왕궁을 버리고 출가했던 그
고타마 싯다르타같이.
몸 주위로 밀려드는 개미떼 조문 행렬 까마득히,
하루가 간다.
-시집『꽃나무 아래의 키스』(천년의시작,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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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寂滅
최금녀
비 그친 뒤 잔디밭 여기저기에
흙거품이 솟아났다
지렁이가 뚫어놓은 숨구멍이다
봄볕이 비오듯 쏟아지고
하늘도, 숨구멍도, 잔디밭도
수런거리는데
지렁이는
배 뒤집고 누워 꼼짝 않는다
습기 찬 땅속보다는
숨통이 트인다는 뜻일까,
비 지나간 하늘
초록이 짙푸르게 일어나고
짙푸른 초록 위에 길게 누워
이제는 그만 잠이 들고 싶은 걸까
밀어올린 숨구멍을 그대로 놓아두고
햇볕 속에서 말라간다
온몸 늘어뜨리고
손도 눈도 없이.
-「현대시학」 2007. 12
다음카페 시하늘 | 2009.07.22. 07:32 http://cafe.daum.net/sihanull/DRy/25148
최금녀 시인의 시작 메모의 글에 보면은
이 시를 발표(열린시학 2006년 여름호) 할 때의 제목이 '지렁이' 였다고 합니다.
<<< 지렁이---적멸로 제목 바꿈 >>>
지렁이가 소재인데 제목도 지렁이면 함의의 맛이 덜한데 제목을 불교용어인 '적멸' 로 바꾸므로서 강한 햇볕아래 꼬들꼬들
말라가는 지렁이가 마치 다비식이라도 치르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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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송꽃
이대흠
똬리를 튼 채 말라 있는 지렁이를 보았다
땅에 숨구멍을 내어 땅을 살게 하고
기름지게 하였을 육신
수백 마리의 개미가 달라붙어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사람들 몇 징그럽다면 지나쳐갔다
나는 징그럽다는 말 대신 행복을 빌었다
또 가다가 보도블럭 위에서
모래그물에 걸려 몸부림치는 지렁이를 보았다
은근한 그늘 속으로 그의 몸을 넣어주었다
그는 땅속을 잘 헤집고 다니리라
그 틈으로 민들레 제비꽃 쑥부쟁이
뿌리 잘 뻗으리라
내 여자의 얼굴에 복송꽃이 피었다
-시집『귀가 서럽다』(창비시선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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