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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오독 / 임영조 - 길일(吉日) /이수익 - 적멸寂滅 / 최금녀 - 복송꽃 / 이대흠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0. 8. 23.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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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오독

 

임영조

 

 

장마걷힌 칠월 땡볕에
지렁이가 슬슬 세상을 잰다
시멘트 길을 온몸으로 긴 자국
행서도 아니도 예서도 아닌
초서체로 갈겨 쓴 일대기 같다
한평생 초야에 숨어 굴린 화두를
최후로 남긴 한 행 절명시 같다
그 판독이 어려운 일필휘지를
촉새 몇 마리 따라가며 읽는다
혀 짧은 부리고 쿡쿡 쪼아 맛본다
제멋대로 재잘대는 화려한 오독
각설이 지렁이의 몸보다 길다
오죽 답답하고 지루했으면
隱者가 몸소 나와 배밀이 하랴
쉬파리 떼 성가진 무더위에
벌겋게 달아오늘 肉頭文字로. 
 

 


-『시인의 모자』(창비,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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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일(吉日)

 

이수익
 

 

보도블록 위에
지렁이 한 마리 꼼짝없이
죽어 있다.
그곳이 닿아야 할 제 생애 마지막 지점이라는 듯.


물기 빠진 수축된 환절(環節)이 햇빛 속에 드러나
누워 있음이 문득 지워진 어제처럼
편안하다.


부드럽고 향기로운 흙의 집 떨치고 나와
온몸을 밀어 여기까지 온 장엄한 고행이
이 길에서 비로소 해탈을 이루었는가,
금빛 왕궁을 버리고 출가했던 그
고타마 싯다르타같이.


몸 주위로 밀려드는 개미떼 조문 행렬 까마득히,


하루가 간다.

 


-시집『꽃나무 아래의 키스』(천년의시작,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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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寂滅

 

최금녀

 

 

비 그친 뒤 잔디밭 여기저기에

흙거품이 솟아났다

지렁이가  뚫어놓은 숨구멍이다

 

봄볕이 비오듯 쏟아지고

하늘도, 숨구멍도, 잔디밭도

수런거리는데

지렁이는

배 뒤집고 누워 꼼짝 않는다

 

습기 찬 땅속보다는

숨통이 트인다는 뜻일까,

비 지나간 하늘

초록이 짙푸르게 일어나고

짙푸른 초록 위에 길게 누워

이제는 그만 잠이 들고 싶은 걸까

 

밀어올린 숨구멍을 그대로 놓아두고

햇볕 속에서 말라간다

온몸 늘어뜨리고

손도 눈도 없이.

 
 

-「현대시학」 2007. 12
다음카페 시하늘 | 2009.07.22. 07:32 http://cafe.daum.net/sihanull/DRy/25148 

 

 

최금녀 시인의 시작 메모의 글에 보면은

이 시를 발표(열린시학 2006년 여름호) 할 때의 제목이 '지렁이' 였다고 합니다.

 

<<< 지렁이---적멸로 제목 바꿈 >>>

 

지렁이가 소재인데 제목도 지렁이면 함의의 맛이 덜한데 제목을 불교용어인 '적멸' 로 바꾸므로서 강한 햇볕아래 꼬들꼬들

말라가는 지렁이가 마치 다비식이라도 치르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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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송꽃

 

이대흠

 

 

똬리를 튼 채 말라 있는 지렁이를 보았다
땅에 숨구멍을 내어 땅을 살게 하고
기름지게 하였을 육신
수백 마리의 개미가 달라붙어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사람들 몇 징그럽다면 지나쳐갔다
나는 징그럽다는 말 대신 행복을 빌었다


또 가다가 보도블럭 위에서
모래그물에 걸려 몸부림치는 지렁이를 보았다


은근한 그늘 속으로 그의 몸을 넣어주었다
그는 땅속을 잘 헤집고 다니리라
그 틈으로 민들레 제비꽃 쑥부쟁이
뿌리 잘 뻗으리라


내 여자의 얼굴에 복송꽃이 피었다

 

 

 

-시집『귀가 서럽다』(창비시선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