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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송화/송찬호-채송화/박후기-채송화/임영조-채송화/고광헌-채송화/윤효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0. 8. 18.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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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송화

 

송찬호

 

 

이 책은 소인국 이야기이다

 

이 책을 읽을 땐 쪼그려 앉아야 한다

 

책속 소인국으로 건너가는 배는 오로지 버려진 구두 한 짝

 

깨진 조각 거울이 그곳의 가장 커다란 호수

 

고양이는 고양이수염으로 포도씨만한 주석을 달고

 

비둘기는 비둘기똥으로 헌사를 남겼다

 

물뿌리개 하나로 뜨락과 울타리

 

모두 적실 수 있는 작은 영토

 

나의 책에 채송화가 피어 있다

 


 

-『애지』, 2005, 가을

-『반경환 명시감상 1』 . 종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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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송화

 

박후기

 


1

무너진 집안의 막내인 나는

가난한 어머니가

소파수술비만 구했어도

이 세상에 없는 아이

구석진 울타리 밑에서

흙을 먹으며 놀아도

키가 자라지 않아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2

엄마는 동생을 또 지웠다

여전히 나는 막내다

 


3

회를 앓는 내 얼굴은

자주 시들었다

태양을 벗어나기 위해

여름내 내가 기어간 길은

한 뼘도 안 되는 거리

 
4

내 키는 너무 작아서

바람의 손길도 닿지 않았지만

보름달 같은 엄마 엉덩이가

이마에 닿기도 했다

엄마는 아무 때나

울타리 밑에 쪼그리고 앉아

오줌을 누었다

죽은 동생들이

노란 오줌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시집『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창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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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송화


임영조

 

 

한여름 뙤약볕 아래
하반신이 불구된 아이들이
눈부신 부채춤을 펼친다


하양 노랑 빨강 파랑
싱글벙글 어울려 손에 손 잡고
안쓰럽게 돌아가는 화려한 원무


나는 지금 넋 나간 사람
너희들의 황홀한 율동을 보며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내 멀쩡한 사지가 부끄럽구나


오냐, 오냐, 장하다
사무치는슬픔까지 꽃이 된다면
노래쯤은 한 박자 느려도 좋고
동작이야 이따금 틀려도 좋다


저 죄 없는 어린것들을
세상에 보낸 천형을 내린 것은
신의 마지막 실수였을까? 아니면
일부러 획 하나씩 빼놓고 빚어
스스로 아픈 곳을 채우는 하는
눈물겨운 경이를 시험하는 것일까?

 

 


임영조 시전집『그대에게 가는 길 1(제3시집 갈대는 배후가 없다)』(천년의 시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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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송화


고광헌

 

 

고향 형님 댁 앞마당
키 작은 채송화
고등학교 시절 집에 갔을 때
구겨진 오천원짜리 쥐여주며
서울 공부 잘해야 한다던
눈 큰 형수 닮았다


60년대 초 어느 겨울날
한 집안으로 시집와
내리 딸만 다섯 낳고, 평생
살금살금
가만가만 사시다가
일흔살도 안돼 떠난
눈 크고 키 작은 형수


형수가 낳은 딸 다섯
닮았다

 

 

 

- 시집『시간은 무겁다』(창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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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송화

 
김윤현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일이라면
나지막하게라도 꽃을 피우겠습니다
꽃잎을 달고 향기도 풍기겠습니다
이름을 달지 못하는 꽃도 많습니다
토담 위라고 불만이 있을 리 없지요
속셈이 있어 빨강 노랑 분홍의 빛깔을
마음 환하게 열린다면 그만이겠습니다
몸을 세워 높은 곳에 이르지 못하고
화려하지 않아도 세상 살아갑니다

 

 

 

- 시집『들꽃을 엿듣다』(詩와에세이,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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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송화 4


윤효

 


고 작을 꽃이
씨앗 속에
새겨 넣는 말은
이것뿐이다.


한여름 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날을 골라
씨앗 속에
꼭꼭
새겨 말은
다만 이것뿐이다.


몸을 일으키지 마라.
꽃을 피우되
절대로
꽃대를 세우지 마라.


이 말을 전하기 위해
고 작은 꽃은
해마다
고 자리에
꼭꼭
꽃을 피운다.

 

 

 

-시집『햇살방석』 (시학,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