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읽고 -수필

야트막한 사랑/강형철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0. 8. 27.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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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트막한 사랑/강형철

 

 


사랑 하나 갖고 싶었네
언덕 위의 사랑 아니라
태산준령 고매한 사랑 아니라
갸우듬한 어깨 서로의 키를 재며
경계도 없이 이웃하며 사는 사람들
웃음으로 넉넉한

 

사랑 하나 갖고 싶었네
매섭게 몰아치는 눈보라의 사랑 아니라
개운하게 쏟아지는 장대비 사랑 아니라
야트막한 산등성이
여린 풀잎을 적시며 내리는 이슬비
온 마음을 휘감되 아무것도 휘감은 적 없는

 

사랑 하나 갖고 싶었네
이제 마를대로 마른 뼈
그 옆에 갸우뚱 고개를 들고 선 참나리
꿀 좀 핥을까 기웃대는 일벌
한오큼 얻은 꿀로 얼굴 한번 훔치고
하늘로 날아가는

 

사랑 하나 갖고 싶었네
가슴이 뛸 만큼 다 뛰어서
짱뚱어 한 마리 등허리도 넘기 힘들어
개펄로 에돌아
서해 긴 포구를 잦아드는 밀물
마침내 한 바다를 이루는

 


《도선장 불빛아래 서 있다》창비
-조명숙 엮음『하늘연인』(열음사, 2006)

-시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5』(국립공원, 2007)

 

 

최재봉 기자가 쓴 <한겨레 2002.10.27(일)> 기사 내용에 보면은 강형철 시인은 시집 <야트막한 사랑> 이후 10년만에 창비에서 <도선장 불빛아래 서 있다>를 냈는데 이 시가 앞머리에 올라 앉아 있다고 한다. 지난 시집의 것을 재수록한 것이 아니라 먼저 시집 제목으로 쓴 다음 그 제목의 시를 쓴 것이라고 한다.


10년 전에 제목으로 쓴 시를 나중에 시로 써서 그런지 퍽이나 이채로운데 이 시는 인터넷의 많은 카페와 블로그에 올라와 있다. 그런데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시와 지금 올린 시와 3연과 4연이 통째로 바뀌어져 있다. 처음 발표한 지면이 어느 잡지인지, 언제 수정했는지 모르지만 4연 전체가 위로 올라가고 3연 전체가 내려온 것이다.  다만 '젖어드는' 이 '4연 5행 '잦아드는' 으로 수정이 돼 있을 뿐이다.


작가가 최종적으로 수정한 시가 옮겨다니면 좋겠지만 이 또한 인터넷의 부작용의 단면이라고 해도 순기능이 많은 인터넷을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작품을 죽을 때까지 수정한다는 말처럼 작가가 처음 발표한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아 손을 보는 것은 당연하지만 수정을 했다면 주를 달아놓거나 날짜를 적어놓으면 혼란을 조금이라도 방지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 세상 완전한 사랑이 어디에 있을까. 장대비 치는 사랑과 눈보라치는 격정적인 사랑이라고 해도 꽃에서 한 움큼의 꿀을 얻어 가면 그만인 꿀벌처럼 그것이 순수함에서 시작되었든 외로움에서 비롯되었든 지나친 집착이나 소유개념이 돼 버리면 이상적인 사랑은 멀어지기 마련이다. 한 움큼의 꿀을 훔치는 순간 마치 속박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식지 않는 사랑을 하려면은, 변하지 않는 '야트막한 사랑'을 하려면은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인가 서둘려 이루려할 욕망을 갖지 않은 채 기다림의 미학도 배워볼 일이고 여린 풀잎을 적시며 내리는 이슬비처럼 온 마음을 휘감되 아무 것도 휘감은 것 같지 않는 내면의 아름다움도 키워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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