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목/윤제림
나 어릴 때 학교서 장갑 한 짝을 잃고
울면서 집에 온 적이 있었지
부지깽이로 죽도록 맞고 엄마한테 쫓겨났지
제 물건 하나 간수 못 하는 놈은
밥 먹일 필요도 없다고
엄마는 문을 닫았지
장갑 찾기 전엔 집에 들어오지 말라며.
그런데 저를 어쩌나
스리랑카에서 왔다는 저 늙은 소년은
손목 한 짝을 흘렸네
몇살이나 먹었을까 겁에 질린 눈은
아직도 여덟 살처럼 깊고 맑은데
장갑도 아니고 손목을 잃었네
한하운처럼 손가락 한 마디도 아니고
발가락 하나도 아니고
손목을 잃었네.
어찌할거나 어찌 집에 갈거나
제 손목도 간수 못 한 자식이.
저 움푹한 눈망울을 닮은
엄마 아버지 아니 온 식구가, 아니
온 동네가 빗자루를 들고 쫓을 테지
손목 찾아오라고 찾기 전엔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말라고.
찾아보세나 사람들아
붙여보세나 동무들아
고대로 못 붙여 보내면
고이 싸서 동무들 편에 들려 보내야지
들고 가서 이렇게 못 쓰게 되었으니
묻어버려야 쓰겠다고
걔 엄마 아버지한테 보이기라도 해야지
장갑도 아니고
손목인데.
-「그는 걸어서 온다」 문학동네
외발이 씨개또(스케이트)를 아시나요. 사오십대 산골이나 시골서 자란 세대라면 각기목이나 나무 발 중간에다 홈을 파서 쇠날을 끼워 넣고 송판으로 양날개를 잡아 세워서 타는 외발로 된 씨개또를 아실 것이다. 쪼그려 안거나 무릎 끓고 타는 앉은뱅이 양발 썰매보다 서서 중심을 잡아야하기에 고난도의 기술이 필요해 초등 고학년이나 중등생 이상이 타던 썰매였었다.
비사치기나 자치기, 땅따먹기 같은 놀이가 여름 놀이라면 연날리기나 쥐불놀이, 팽이치기는 컴퓨터 오락이나 게임처럼 기계적 놀이가 없던 시절의 겨울놀이였는데 그중 썰매는 꽁꽁 언 거랑에서 마주 쌩쌩 부는 고추바람도 아랑곳하지 않는 겨울놀이의 백미였었다. 스케이트장처럼 얼음도 고르지 않고 가끔가다 돌멩이도 솟아있는 울퉁불퉁한 얼음판을 정신없이 썰매를 지치다가 덧물에 엎어지고 자빠지다 보면 엉덩이도 젖고 양발도 축축해진다. 그제서야 배도 고프고 발도 시리다.
고픈 배야 어쩔 수 없지만 시린 발은 주위의 검불이나 잎나무, 장작개비, 헌 고무신 같은 잡동사니를 태워서 모닥불이나 화톳불을 만들어 발을 녹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발이 별로 뜨거운 것 같지 않았는데 어느새 보면 양말에 구멍이 나있다. 이런 날은 어머니로부터 꾸중들을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그것이 새 양말이라면 부지깽이로 얻어맞고 밥도 못 먹고 쫓겨나서 어머니의 속이 풀릴 때까지 대문 앞에 몇 시간쯤은 서있어야 했다.
물자가 귀하던 시절 양발 하나, 장갑 하나가 얼마나 귀했었는가. 지금은 흔해도 너무 흔해 쓰지도 않는 면장갑, 가죽장갑, 스키장갑, 털장갑이 식구수대로 다 있고 두 개씩도 있어 너무도 많다. 성장도 좋지만 지구의 자원을 얼마큼 써야 만족할는지 매년 경제성장을 외친다. 자원이 고갈되고 나서야 절약이 미덕인 시대가 오려는지 쓰레기는 넘쳐나는데 계속 소비를 촉진하라고 한다.
스리랑카 청년은 장갑 살 돈을 벌려고 왔다가 그만 장갑을 낄 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손이 없는데 장갑이 어디에 필요할까. 저렇게 손목 없이 고국으로 돌아가면 동네의 따가운 시선에 무슨 죄나 지은 것처럼 주눅이 들고 어머니 아버지는 또 얼마나 놀랐까. 일시적인 연민이나 동정이 아닌 사람대 사람으로 인격적으로 감싸안을 때 손목 잃은 아픔을 다소나마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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