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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티와 빤쓰/손현숙-단풍나무 빤스/손택수 외 김경주 1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0. 9. 3.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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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티와 빤쓰 

 

           손현숙


외출을 할 때는 뱀이 허물을 벗듯
우선 빤쓰부터 벗어야 한다
고무줄이 약간 늘어나 불편하지만, 편안하지만,
그래서 빤쓰지만 땡땡이 물무늬 빤쓰

집구석용 푸르댕댕 빤쓰는 벗어버리고
레이스팬티로 갈아입어야 한다
앙증맞고 맛있는 꽃무늬팬티 두 다리에 살살 끼우면
약간 마음이 간지럽고 살이 나풀댄다
나는 다시 우아하고 예쁜 레이스공주

밖에서 느닷없이 교통사고라도 당한다면
세상에, 땡땡이 빤쓰인 채로 공개되면 어쩌나
비싼 쎄콤장치로 만약의 위험에 대비하듯
유명 라펠라 팬티로 단단한 무장을 한다

오늘 바람이라도 살랑, 불라치면
혹시라도 치마가 팔랑, 뒤집힌다면
나 죽어도 꽃무늬 레이스로 들키고 싶다


-『애지』2007년 여름호<반경환 명시감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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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나무 빤스

 

                  손택수

 


아내의 빤스에 구멍이 난 걸 알게 된 건
단풍나무 때문이다
단풍나무가 아내의 꽃무늬 빤스를 입고
볼을 붉혔기 때문이다


열어놓은 베란다 창문을 넘어
아파트 화단 아래 떨어진
아내의 속옷,
나뭇가지에 척 걸쳐져 속옷 한 벌 사준 적 없는
속없는 지아비를 빤히 올려다보는 빤스


누가 볼까 얼른 한달음에 뛰어내려가
단풍나무를 기어올랐다 나는
첫날밤처럼 구멍 난 단풍나무 빤스를 벗기며 내내
볼이 화끈거렸다


그 이후부터다, 단풍나무만 보면
단풍보다 내 볼이 더 바알개지는 것은

 


-『목련 전차』(창비, 2006)
2010-09-03 / 21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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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 / 김경주

 


고향에 내려와
빨래를 널어보고서야 알았네.
어머니가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는
사실을
눈 내리는 시장 리어카에서
어린 나를 옆에 세워두고
열심히 고르시던 가족의 팬티들
펑퍼짐한 엉덩이처럼 풀린 하늘로
확성기 소리 짱짱하게 날아가네, 그 속에서 하늘하늘한
팬티 한 장 어머니


볼에 문질러보네. 안감이 붉어지도록
손끝으로 비벼보시던 꽃무늬가
어머니를 아직껏 여자로 살게 하는 무늬였음을
오늘은 그 적멸이 내 볼에 어리네

 

 

-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2006> 중에서
-월간『현대시』(2003, 11월호)

 

 

 

 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

 

                                          김경주


 

고향에 내려와
빨래를 널어보고서야 알았다
어머니가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는 사실을
눈 내리는 시장 리어커에서
어린 나를 옆에 세워두고
열심히 고르시던 가족의 팬티들,
펑퍼짐한 엉덩이처럼 풀린 하늘로
확성기 소리 짱짱하게 날아가던, 그 속에서
하늘하늘한 팬티 한 장 꺼내들고 어머니
볼에 따뜻한 순면을 문지르고 있다
한감이 촉촉하게 붉어지도록
손끝으로 비벼보시던 꽃무늬가
어머니를 아직껏 여자로 살게 하는 한 무늬였음을
오늘은 죄 많게 그 꽃무늬가 내 볼에 어린다
어머니 몸소 세월로 증명했듯
삶은, 팬티를 다시 입고 시작하는 순간순간
사람들이 아무리 만지작거려도
팬티들은 싱싱했던 것처럼
웬만해선 팬티 속 이 꽃들은 시들지 않았으리라
빨랫줄에 하나씩 열리는 팬티들로
뜬 눈 송이 몇 점 다가와 곱게 물든다
쪼글쪼글한 꽃 속에서 맑은 꽃물이 똑똑 떨어진다
눈덩이 만한 나프탈렌과 함께
서랍 속에서 수줍어하곤 했을
어머니의 오래 된 팬티 한 장
푸르스름한 살 냄새 속으로 햇볕이 포근히 엉겨 붙는다

 

 

-시집『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중앙, 2006)
2010-09-03 / 21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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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팬티

 

               손한옥
 


1


메리 크리스마스에 책을 선물로 받았다
책장을 넘기다가 어느 시인의 시『팬티』에 손을 베이다
팔랑 바람이 불어 치마가 올라가고
그 사이로 보이던 레이스 팬티
방 한쪽 구석에 그녀가 벗어놓고 간 물방울 무늬 팬티처럼
피, 동글동글 떨어진다
즐거운 팬티 몰래 보지 마라고
날카로운 책은 날을 세웠다

 


2


메리 크리스마스에 레이스 달린 팬티와 브래지어를 선물로 받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로부터
-메리 크리스마스! 형님, 바람 피울 때 입으세요!
이런 이런, 요망스러운 것이!
귀여운 것이!

 


3


몇 해가 지난 오늘,
메리 크리스마스를 달고 상표를 달고
팬티와 브래지어가 서랍 한 켠에 누워 있다
아직도 나는 꿈꾼다
관솔이 타오르는 캄캄한 숲 속 산장
채털리부인의 멜러즈를

 

 

―시집『직설적, 아주 직설적인』(천년의 시작, 2010)
2011-05-27 / 금요일, 오전 08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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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난 뒤의 팬티


              오규원

 

  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만 가까워져도 앞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자(者)도 아닌 죽은 자(者)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울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김재홍 편저『작은 들꽃이 보고 싶을 때』(문학수첩, 2003)
2011-11-25 / 금요일, 오전 09시 26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