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장(殉葬)/최재영
오랜 세월 방치되었던 유골은 아직 신원미상이다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한쪽으로 돌아누운 체념뿐이다
슬픔이나 분노는 불경한 것이므로 매장할 수 없다
숱하게 이승을 열고 닫던 시신의 안구는 텅 비어
완전하게 썩은 복종이
퀭하게 뚫린 구멍을 가득 메우고 있다
무덤 속에서 소통되는 건 공포와 침묵뿐이었으므로
두 눈은 오히려 번거로운 장신구였으리라
올가미에 엮여진 미미한 저항들이
서로 깍지 끼운 절망을 호흡하였으리라
얼마나 멀리 왔을까
무덤 속 길을 열자
진공 속에서 지탱되던 맹목적인 관습이 한꺼번에 허물어지고
수 천 년을 지내는 동안 순종을 세습하였는지
유골들은 가지런하고 편안하다
죽음은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행운의 부장품이었을 것이다
아득한 바닥의 깊이를 가슴에 품는 순간
세상의 낮과 밤이 닫혀지고
귀천의 형식은 이승의 내력과 함께 풍화되었다
남은 건 순장뿐이다
-최재영 시집『 루파나레라』. (천년의 시작. 2010)
2010. 03.23 밤 10시 20분
순장/안효희
그 속엔 장롱과 냉장고와 세탁기도 있지, 나의 사랑과 나의 궁핍과 나의 파열도 있지
꼬리를 단 시간이 재깍거리고, 날짜들이 깃발처럼 벽에 걸려 펄럭거리지, 건너편 고층빌딩이 통유리 넓은 창으로 24시간 들여다보지
행복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는 것들로 점점 배가 불러지면, 아치형 창을 내고 40층 50층까지 올라갈 수 있지
밤이 되면 전자 키 달린 출입문 안에서 혼자 밥을 먹지
곁에 누운 남자가 가끔 눈을 뜨고 일어나지, 빠끔빠끔 담배를 피우고, 그러다 다시 죽은 척하지
더불어 사는 무덤 1605호분
불룩한 배를 만지며 하루에도 몇 번씩, 아무도 몰래 작은 아이를 낳지 바깥으로 바깥으로 기어나가는,
-계간『시와 반시』(2010, 봄호)
2010-08-31 / 오전 09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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