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플라워
문인수
마음 옮긴 애인은 빛깔만 남는다.
말린 장미, 안개꽃 한 바구니가 전화기 옆에
놓여 있다. 오래,
기별 없다. 너는 이제 내게 젖지 않아서
손 뻗어 건드리면 바스라지는 허물, 먼지 같은 시간들,
가고 없는 향기가 자욱하게 눈앞을 가릴 때
찔린다. 이 뾰족한 가시는
딱딱하게 굳은 독한 상처이거나 먼 길 소실 점,
그 끝이어서 문득, 문득 찔린다.
이것이 너 떠난 발자국 소리이다.
(2004년도 제18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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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꽃
이선영
시들고야 말았다
식었다
그대에게서 오래 전 받은 따뜻한 꽃 한송이
벽에 거꾸로 매달린 채 하세월
사랑은 말라붙고 꽃만 남기고
기어이 그대를 벽에 꽂아놓진 못했어도
내 마음 깊은 어디쯤에
딱딱하게 걸려 넘어가지 않는 마른 꽃
속이 다 비고도
바스라지지 않는
- 시집『일찍 늙으매 꽃꿈』(창작과비평,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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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플라워
고진하
말린 들국이 둥근 대나무 접시에 담겨 있다
꽃을 따서 그늘에 펴 말린 손끝, 그 어여쁜 섬섬옥수는
어디로 외출한 것일까 그녀의 큰 빽인 하느님과 팔장 끼고
어디 먼 데로 외출한 것일까, 탈수된 영혼 같은
마른 들국만 제단 앞에 놓여 있다
무슨 신호일까
기도의 습기조차 말리라는 것일까
말린 들국이 둥근 대나무 접시에 담겨 있다
-시집 『거룩한 낭비』(뿔,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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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플라워
장요원
해를 보면 자꾸만 어지러워
거꾸로 매달렸다
꽃대가 밀어올린 향이 오르던 그 보폭으로 흘러 내렸다
향기의 내용이 다 비워지기까지
붉어진 시간만큼 외로웠다
문득,
유리병 속을 뛰어 내리는 코르크마개의 자세가 궁금했다
핑킹가위 같은 비문들이 잘려 나갔다
창백해졌다
소소한 바람에도 현기증이 난다
무릎이 잘린 낯선 걸음들이 유리문을 지나갔다
유리에 서성이던 웃음들이 싹둑 잘렸다
통점은 훼손된 부위가 아니라
향기의 왼쪽에 있다고 생각했다
붕대처럼, 향기를 왼쪽으로 감아 올라가는 나팔꽃을 본 적이 있지
그들의 심장이 왼쪽에 있을 거라는 편견도
흘러 내렸다
내력 없이 내리는 안개비에도 쉬이 얼룩이 번진다
허공이 우산처럼 접히고 있다
홀쭉해졌다
장미의 유전자를 가진 나는
온몸에 가시가 돋아 있고
흔들릴 때마다 스스로
할퀴었다
가시와 향기는 다른 구조를 가진 같은 슬픔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몸속에서 너라는 물질이 다 휘발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바로 설 수 있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벽에 걸린 캔들홀더 속
검은 심지가
잊어버린 어제를 켜고 있다
-월간『현대시 』(201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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