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읽고 -수필

주유소/윤성택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1. 5. 28. 10:30
728x90

주유소/윤성택

 


단풍나무 그늘이 소인처럼 찍힌
주유소가 있다 기다림의 끝,
새끼손가락 걸 듯 주유기가 투입구에 걸린다
행간에 서서히 차오르는 숫자들
어느 먼 곳까지 나를 약속해줄까
주유원이 건네준 볼펜과 계산서를 받으며
연애편지를 떠올리는 것은
서명이 아름다웠던 시절
끝내 부치지 못했던 편지 때문만은 아니다
함부로 불 질렀던 청춘은
라이터 없이도 불안했거나 불온했으므로
돌이켜보면 사랑도 휘발성이었던 것,
그래서 오색의 만국기가 펄럭이는 이곳은
먼 길을 떠나야 하는
항공우편봉투 네 귀퉁이처럼 쓸쓸하다
초행길을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여전히
그리운 것들은 모두 우회로에 있다
 


-「리트머스」2006. 문학동네

 

 


언제가 홀로 등산을 하다가 라디오소리, 음식냄새, 떠드는 소리를 피해서 옆길로 샛다가 방향을 몰라 헤맨 적이 있었다. 골짝 옆으로 작은 길이 나있어 얼른 들어선 것인데 가다보니 희미한 길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다. 어릴 때 뒷산에 친구들과 나무하러 갔다가 길을 잃으면 의견이 분분해져 손바닥에 침을 뱉어 침점을 쳤는데 침점의 효용을 잃어버려 짐작만으로 가는데 불안이 엄습해온다. 내재된 내비게이션의 빨간불을 켜고 벌레의 수신호를 받아보지만 산 속에 들면 산이 보이지를 않는것처럼 낯선 곳의 두려움은 불안을 형성하고 불안은 변형된 그리움을 낳는다.

 

길치인 사람은 고속도로를 애용해야지 웬만큼 밀리지 않으면 국도로 빠지지 말아야 한다.  낯선 길을 잘못 나서면 헤매기 때문이다. 그것도 대낮이라면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기라도 할텐데 어느 해 명절 고향 가는 길, 야밤에 두름길로 빠졌다가 가도가도 안내판이 보이지 않아 저으기 당황을 한 적이 있었다. 강원도의 산은 높고 모롱이는 길어 또아리를 푸는 뱀처럼 핸들을 오르로 외로 천천히 풀고 당겨야 한다. 바닥은 살짝 얼어있어 전조등 불빛에 의존해 가는데 기름 상황을 알려주는 바늘이 왼쪽 아래 끝을 향하고 있다.

 

평소에는 계기판에 빨간불이 들어오기 전에 미리미리 기름을 넣고 다니는데 이 산을 넘기 전에 산 속에서 차가 서버릴까 조마조마하다. 낮에 기름을 보충해두지 않는 것을 후회하고 길 안 막힐 때 떠나자며 불쑥 서둘러서 출발한 것을 후회하고 밀린다고 순간적으로 우회로로 핸들을 돌린 것을 후회한다. 옆에 앉은 사람은 자신이 없으면 그냥 고속도로로 가지 알지도 못하는 길로 나왔다고 종달새처럼 종알거리고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온 것 같다. 그러다가 주유구가 두 대 설치된 자그마한 주유소를 만나면서 변형된 그리움은 해소돼 버린다.

 

그리움은 모두 우회로에 있다고 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직선인 삶에는 그리움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움은 직선에 있지 아니하고 곡선에 있다. 지름길에 있지 아니하며 에둘러 가는 길에 있고 잘못 든 길에 그리움이 포진해 있다. 굽이 돌아드는 강물에 그리움이 숨어있고 골목길 꺾어드는 곳에 그리움이 남아있는 것처럼 구불구불한 길이 아닌 반듯한 길에서 어떻게 그리움이 생기겠는가. 보이지 비탈길 뒷길에 그리움이 있고 그리움은 두름길에서 불안의  똬리르 틀고 있다.

 

그리운 것은 산너머에 있고 미지의 세계에 있고 모르는 곳에 있으며 낯선 곳에 그리움이 존재를 한다. 편안한 곳에서는 그리움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움은 불안한 곳에 서식하며 불편한 곳에 뿌리를 내린다. 그리움이 그립다면 낯선 곳을 찾아가 볼일이다. 불편한 곳을 발을 디뎌 상충의 그리움을 만나볼 일이다.

 

 

'시를♠읽고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희망/ 정희성   (0) 2011.05.28
어머니의 그륵/정일근   (0) 2011.05.28
내가 죽거든/크리스티나 로제티   (0) 2011.05.14
흔들릴 때마다 한 잔/甘泰俊  (0) 2011.04.12
쑥국/최영철  (0) 2011.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