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에 기대어/송수권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날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며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山茶花)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날
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날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산문에 기대어)』. 문학과지성사. 1980)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07)
내 동생의 손/마종기
생시에도 부드럽게 정이 가던 손,
늙지 않은 나이에 자유롭게 되어
죽은 후에는 내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닌다.
속상하게 마음 아픈 날에는 주머니 뒤져
아직 따뜻한 동생의 손을 잡으면
아프던 내 뼈들이 편안해진다.
내 보약이 되어버린 동생의 약손,
주머니에서 나와 때로는 공중에 뜨는
눈에 익은 손, 돈에 익지 않은 손.
내 동생의 손이 젖어 우는 날에는
내가 두 손으로 잡고 달래주어야
생시처럼 울음을 그치는 눈물 많은 손.
내 동생이 땅과 하늘에 묻은 손,
땅과 하늘이 슬픔의 원천인가,
그 슬픔도 지나 멀리 떠나는
안타깝게 손 흔들어대는
내 동생의 저 떨리는 손!
-시집『이슬의 눈』(문학과지성사, 2009)
下官/박목월
관(棺)이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
주여
容納하옵소서.
머리맡에 聖經을 얹어 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下直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
兄님!
불렀다.
오오냐, 나는 全身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音聲을
나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쓰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 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
<난(蘭), 기타>(1959)
http://blog.naver.com/kiroro1956/130086957612
박목월의 <하관>' 은 시에 '형님' 이라고 나오니까 남동생임이 분명하고, 마종기의 <내 동생의 손>에는 남동생인지 여동생인지 구별을 해놓지 않았지만 남동생 같고, 송수권의 '산문에 기대어' 는 내용에서는 누이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이십대에 인위적으로 목숨을 끊은 남동생이라고 합니다.
세 편 다 화자보다 일찍 세상을 떠난 동생의 죽음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지만 죽음에 남녀 노소 따로 없다는 회심곡에 나오는 것처럼 죽음은 나이 순위가 아니라서 태어나자마자 바로 죽을 수도 있는데 그랬더라면 연민 외에 정서상의 유대가 없어 정신적인 공황은 없을 수도 있겠지요.
저는 어머니와 이십대 초반에 이별을 하고 아버지는 가정을 이루고 사십이 다 되어갈 즈음 작별을 하였는데 받아들이는 죽음에 대한 느낌은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위의 세 편의 시도 정서의 차이로 느낌이 다릅니다. '내 동생의 손과 하관' 은 나 어린 동생이 먼저 죽어 비록 비감하지만 운명처럼 받아들이는데 '산문에 기대어' 는 젊은 죽음 때문인지 안타까워하며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며 재회를 희망합니다.
죽음이 슬픈 것은 맛있는 것을 같이 먹을 수도 없고 같이 여행을 다닐 수도 없으며 사랑하는 이의 다감한 목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가슴이 아린 것은 죽음은 이 세상에서 다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고통이 가장 큰 아픔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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