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ZDF의 역사 다큐멘터리 "Die Wehrmacht"를 소개하면서, 또 다른 올해의 화제작 "Die Gustloff"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였다. 이는 역사상 최악의 해난사고로 기억되고 있는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의 비극에 대한 미니시리즈(및 해설 다큐멘터리)이다.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는 전쟁 전에는 여객선으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병원선으로 쓰인 배였다. 그러다가 대전 막바지인 1945년 1월, 복수심에 가득해 밀어닥친 소련군을 피해 동프로이센의 피난민들을 해상 소개시키는 임무(한니발 작전)에 동원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잊지 못할 상처를 남긴 운명의 시간은 묘하게도 히틀러 집권 12주년인 1월 30일에 찾아왔다. 차디찬 발트해를 따라 피난민을 가득 싣고 항행하던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는 소련 잠수함 S-13호에서 발사한 어뢰에 피격, 침몰했다. 2천 명 정원의 배에 1만여 명이 타고 있었으니 그 아비규환이란…… 이 한 번의 사고로 무려 9,343명이 사망했다.
이 사고는 타이타닉 호의 침몰(사망자 1,517명)에 비해서도 훨씬 비참한 사건이었음에도, 오랜 세월 역사의 조명을 받을 수 없었다. 전쟁을 도발한 독일인들, 게다가 이제는 남의 나라 땅이 되어버린 동프로이센 사람들이 피해자였다는 이유였다. 희생자 절반이 철 모르는 어린이였고, 나머지 대다수도 애꿎은 피난민 여성이었음에도 말이다. 구스틀로프 호 사건이 공론화되는 것 자체가 나찌의 죄상을 희석시키려는 불순한 의도로 치부되고는 했다.
그러다가 2002년에 독일 사회에서 갑작스레 이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는 『Die Blechtrommel (양철북)』으로 유명한 독일의 문호 귄터 그라스의 힘이었다. 그가 구스틀로프 호 사건을 소재로 독일 사회 이면의 갈등을 파헤친 『Im Krebsgang (게걸음으로 가다)』를 발표한 것이 계기였다. 그 후 구스틀로프 호 참사에 대한 저작들이 독일에서도 여럿 출간되었고, 이제 ZDF에서 역사를 회고하는 다큐멘터리와 미니시리즈까지 제작되었다. 영화 "스탈린그라드"의 감독으로도 알려진 요제프 필스마이어(Joseph Vilsmaier)가 메가폰을 잡은 미니시리즈는 생각만큼 호평을 받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ZDF의 (VOD로도 공개한) 2부작 다큐멘터리만으로도 『Im Krebsgang』이 주었던 강렬한 느낌이 다시금 깨어나는 것 같다:
- Hafen der Hoffnung (희망의 항구)
소련군이 동프로이센에 침공하자 수백만 동부독일인들의 희망은 고텐하펜(Gotenhafen)으로 쏠린다. 차가운 겨울의 풍설 속에서 고향을 등진 이들의 슬픈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 Flucht über die Ostsee (발트해를 통한 탈출)
애써 구스틀로프 호에 오른 9천여 피난민에게 발트해는 결국 그들의 무덤이 되고 말았다. 자세한 피격 정황과 생존자들이 전하는 당시의 아비규환과 뒷얘기를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구스틀로프 호 참사 이튿날 새벽 바다 재연 장면. 9천여 명이 이렇게 죽었다.
이쯤 되면 Periskop 방문객 여러분들 가운데에는 이런 의문을 품으실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멀리 이국 땅에서 전쟁 중에 일어난 비극이 뭐 그리 대수이겠냐고. 그것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독일어 조금 할 줄 안다고 자랑하느냐는 푸념까지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홈지기가 이 구스틀로프 호 사건과 귄터 그라스의 『Im Krebsgang』, ZDF의 다큐멘터리를 함께 소개함이 그저 지적 호사만을 누리려는 뜻은 아니다. 홈지기는 나름대로 이들 속에서 우리가 처한 현실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 느낌을 얼마나 전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이를 설명하기 위해 6년 전(2002년 5월 28일)에 『Im Krebsgang』을 읽고 옛 Periskop에 올린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귄터 그라스의 『게걸음으로 가다』와 독일의 역사적 멍에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접한 것은 올해 초였다. 대략 2월 경에 국내 몇몇 언론에서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의 하나요,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귄터 그라스(Günter Grass)가 독일 사회의 금기를 깨고 빌헬름 구스틀로프(Wilhelm Gustloff) 호의 비극을 들춰내어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는 짤막한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홈지기가 구스틀로프 호의 참사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정확히 언제, 어느 책에서인지는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아마도 동프로이센과 폼메른 일대 독일 제3 제국 최후의 저항에 관한 내용을 찾아보면서가 처음이었고, 그 뒤에 FeldGrau의 A Memorial to the Wilhelm Gustloff 페이지에서 보다 자세한 내용을 접하게 되었던 것 같다. 2차대전 초기에 독일이 소련에서 저질렀던 만행은 분명 용서하기 힘든 범죄였다. 그럼에도 그 보복으로 동부 독일인들이 겪어야 했던 숱한 참상, 그 한 가운데를 장식하고 있는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의 참사에는 불가피한 전쟁의 비극이라 해도 한참이나 씁쓸함이 느껴졌었다.
그런데 귄터 그라스가 이에 대한 신작을 발표하다니? 좌파의 이미지에 아무리 해도 어울리지 않는다 싶은 귄터 그라스의 신작 소식은 홈지기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당장 독일어판을 주문해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바쁜 연초에, 띄엄띄엄 읽는 독일어 독해 실력으로는 당장 사봤자 제대로 안 읽겠다는 생각에 주문을 피일차일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 들려온 뉴스는 더욱 놀라왔다. 웬일인지 국내에서도 대단히 빠르게 이 작품의 번역이 진행되고 있었다 — 놀랍게도 세계 최초 번역판이란다. 아마 이번 주 월드컵 개막 전야제 축시 낭송을 위해 내한하는 귄터 그라스의 일정에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홈지기는 지난 주 출간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급히 서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한참의 몰입 끝에 책을 놓은 지금, 참으로 묘한 기분에 젖어 이 글을 쓰고 있다.
홈지기는 여기서 구스틀로프 호의 비극에 대해 구구절절 써내려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인터넷만 뒤져봐도 이 참사에 대한 개략적인 이야기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을테고, 무엇보다 실제와 허구를 넘나드는 이 소설 안에 중요한 이야기들은 다 쓰여있다. 참사 표면의 이야기보다 더 가슴깊이 느껴지고, 이 글에서 간략하게 언급해보고 싶은 것은 현대 독일사회에 드리워진 역사적 멍에와 그로 인한 세대간의 간극이다.
세 명의 실존 인물과 세 명의 허구 인물
이 작품에서는 실제의 인물 세 명과 허구의 인물 세 명이 등장한다. 실제의 인물들은 참사를 당한 이 여객선 이름의 주인공 스위스의 나찌당 간부 빌헬름 구스틀로프와 그를 암살한 유태인 청년 다비드 프랑크푸르터, 그리고 구스틀로프 호를 격침시킨 소련 잠수함 S-13호 함장 알렉산드르 마리네스코이다. 허구의 인물들은 구스틀로프 호의 참사가 있던 1945년 1월 30일 그 배에 타고 있던 임산부 툴라 포크리프케, 바로 참사 직전에 배에서 출산한 아들 파울 포크리프케, 또 그의 손자 콘라트 포크리프케이다. 앞의 실제 세 인물은 한 비극의 시대 속에 살면서 그 시대의 의식 속에서 서로 다른 삶의 길을 간 사람들이었고, 뒤의 허구 세 인물은 이어지는 시대 속에서 전혀 다른 기억을 가지고 부모들이 물려준 역사의 멍에를 짊어지고 오늘의 독일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빌헬름 구스틀로프 |
다비드 프랑크푸르터 |
알렉산드르 마리네스코 |
구스틀로프 호의 참사를 현장에서 겪고, 동독 지역의 슈베린(Schwerin)에 정착하여 험난한 전후시대를 억척스럽게 살아오며 아들을 키워온 어머니 툴라에게 동부 독일인들의 비극은 자신의 이야기이다. 그녀에게 나찌 시대의 죄악과 참상은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녀는 독일 촌구석에서 목수일을 즐겼고, 나찌가 계급평등의 기치를 내세우며 KdF(환희역행단)을 통해 제공한 노동자 유람선 여행의 즐거운 기억만을 갖고 있었다. 평범한 처녀에게 제3 제국의 민족사회주의건 동독의 공산주의건 이념의 문제는 삶의 본질을 비켜나있는 것이었다. 오직 피난 행렬 속에서 떨어지는 포화에 자신 옆에 서 있던 숱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1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가득찬 배가 어뢰 3발을 맞아 철모르는 아이들 4천 명을 비롯해 9천 명이 넘는 목숨이 차가운 바다 속에 수장된 비극만이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그의 아들 파울에게 이 모든 것은 있어서는 안되었을, 지긋지긋한 굴레일 뿐이었다. 차라리 그 날 자신을 뱃속에 품고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품는다. 하필이면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바로 그 날, 1월 30일에 그 비극의 장소에서 아버지도 모르고 태어난 사생아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런 자신을 부정하고 싶어한다. 전쟁을 몸소 뼈저리게 겪지는 못하였지만 유년 시절의 기억은 전쟁이 남긴 상처 속에 파묻혀있는 세대였다. 그의 청년기는 68세대의 영향으로 나찌 시대와 연관된 모든 것들이 죄악시되는 시대적인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한 파울의 아들 콘라트는 전쟁의 상처가 모두 아물고, 인터넷이 보급되어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서도 세상에 대해 무언가를 외칠 수 있는 이 시대의 청년이다. 그러나 콘라트는 부모가 이혼하고,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파울이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슈베린의 할머니 곁에서 살아간다. 내성적인 청소년으로서 나찌시대와 2차대전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이미지를 만들기도 힘든 그에게, 학교에서는 나찌시대의 이야기를 무조건 죄악시하고 언급조차 찍어 누른다. 사생아의 아들, 이혼 부부의 아들이라는 어두운 그림자에 알기도 힘든 그 무언가에 대한 강박적인 억압, 그 속에서 콘라트는 독일 나찌시대의 과거와 구스틀로프 호의 이야기에 흥분한다. 그리고 그 탈출구로 인터넷을 찾아 자신의 사이트에 구스틀로프와 나찌시대를 찬양해댄다.
툴라, 파울, 콘라트로 상징되는 독일사회 세 세대의 모습. 이야말로 오늘날 독일이 처한 역사적 딜레마의 한 단면을 잘 드러내고있다. 마치 홈지기가 지난 1997년 독일 여행을 하면서 만나고 느꼈던 이 시대 독일 사람들처럼.
홈지기가 느낀 독일 사회 내면의 갈등
홈지기는 1996~97년 겨울 두 달여 동안 유럽 배낭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웃긴 이야기지만 홈지기는 그 당시에 2차대전사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전쟁사나 독일사에 대한 책 몇 권 읽고서 나름대로는 독일을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하던 터였다. 그리고 그런 생각으로 만나는 독일 사람들과 기회가 닿으면 그들의 지난 20세기 중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내 나름대로의 분석으로 그들의 역사에 대해 선을 긋고 평가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이 커다란 자만이었고, 실로 어처구니없는 짓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기억의 일부로 옮아가보자.
1997년 1월 초, 홈지기는 그 1주여 전에 드레스덴의 유스호스텔에서 만난 금발의 독일 아가씨와 베를린에서 재회했다. 지금 생각해도 아름다웠던 그 아가씨와 나는 베를린 동물원 역(Bahnhof Zoo) 부근 어딘가에서 만나 베를린 대성당 등을 같이 둘러보고 브란덴부르크 문 앞의 카페에서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덧 이야기 주제도 역시나 역사 이야기로 빠졌다. (확실히 제대로 연애 못해본 티가 나는 실수였다.) 스무살이던 그 아가씨는 내가 어설프게 늘어놓던 생각들 — 이를테면 당대 독일인들은 1차대전 패전 이후 침체한 시대 속에서 "강한 독일"을 원했고 그런 민족주의 속에서 돌파구를 찾은 것이 아닌가 — 을 듣더니 단호히 "Nein"이라고 이야기했다. 그게 아냐? 과연 그럼 뭐가 독일을 전쟁으로 이끈거지? 하는 의문에 그 아가씨가 남긴 말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학교에서 그 시대의 역사에 대해 배우고, 주변의 부모나 나이 먹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봐도, 어떻게 자신과 같이 당대를 살아가고 있는 (선량한) 독일인들이 그러한 참극의 가해자일 수 있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홈지기는 내 또래 그 아가씨의 말을 되새기며 골똘한 생각에 그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렇게 홈지기는 베를린에서의 시간을 보내고 다음날 저녁 함부르크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베를린과 이별하는 아쉬움에 기차 컴파트먼트 한 구석에 앉아 있었는데, 맞은 편 자리에는 웬 독일 친구가 앉아 있었다. 좀 있더니 그는 뭔가 어색했는지 딴 컴파트먼트로 사라졌다. 외국인이라 무시당하는 기분에 좀 더 우울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좀 있더니 그 친구는 음료 캔을 들고 와서 홈지기에게 권했다. 아까 날 버리고 딴데로 간게 그도 마음에 좀 걸렸었나보다.
그는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다. 홈지기는 독일어를 조금 알아들으니 그냥 독일어로 이야기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신이 났는지 열심히 독일어로 떠들어대었다. 정신없이 떠들어대는 말을 일천한 독일어 실력으로는 모두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어느새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갔고, 온 몸으로 강변했다. 자신이 이른바 "오씨(서독사람들이 동독출신 사람들을 비하해서 부르는 말)"라고. 자신은 "오씨"에다가 우리 할아버지는 "나찌 친위대"였다, 그런데 자신은 솔직히 할아버지가 나찌의 주구 노릇을 했건 어쩌건 별 상관이 없다고. 그래서 어디가서도 '그게 뭐 어떠냐, 그럴 수도 있지'라는 식으로 이야기한다고.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이놈 (개념 없는) 나찌네!"라면서 자신을 몰아붙인다고.
독일에서 이런 목소리를 들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 했었다. 독일은 나찌에 대한 청산이 잘 되었으니, 과거에 대한 생각도 달라봐야 얼마나 다르겠냐고 막연히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곳 사람들의 목소리도 가지가지였다.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지만, 홈지기는 그 동안 스스로 편견을 갖고 듣고 싶고 보고 싶던 모습에만 눈과 귀를 열어왔다는 생각에 머리가 띵해졌다.
그래서 좀 더 열린 마음으로 또래 청년이나 중년 독일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너무나 다양한 생각을 갖고 있었고, 과거사에 대한 나름대로의 의문을 품고 있었다. 독일어가 달리고 세대차 때문에 전쟁을 겪은 노년층까지 이야기 붙여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대다수 중년층에게 그 시대는 달리 애써 기억해서 이야기거리로 삼고 싶지 않은 과거였고, 내 또래 청년층에게 그 시대는 결코 이해할 수는 없지만 찬양해서도 안되는 무언가 동떨어진 어둠 속의 시대인 것 같았다.
자라나는 세대로서 이해할 수 없는 장벽에는 필연적으로 반동이 있을 수밖에 없다. 홈지기가 보기에 독일은 평균적으로 우리나라보다 훨씬 균형잡힌 국민의식을 가지고 있는 국가였다. 그래도 이러한 비참한 역사가 남긴 세대간 가치관의 차이 속에 무언가 형언하기 힘든 간극이 존재함을 느꼈다. 그 징표가 스킨헤드, 네오나찌 같은 것만은 아니다. 그렇게 극단적인 부류는 어느 사회에나 있을 법한 존재이고 독일만이 더 특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진정한 간극은 평범해 보이는 이 시대의 독일인들 속에 숨어 있었다. 그 아픈 시대의 기억과 유산이 꽁꽁 얼어붙어 있다가, 어느새 여러 다른 모습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독일 통일이 불러온 변화는 이런 문제를 수면 위로 밀어 올리고 있었다. 전후 냉전시대 독일은 그 시대의 역사를 부정하면서 신 민주독일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다. 1980/90년대 역사가논쟁(Historikerstreit)을 둘러싼 치열한 좌우의 격론 속에서 동부 독일인의 비극 문제가 얼마나 독일인들에게 민감하고 치명적인 문제였는지 여실히 볼 수 있지 않았는가.1 독일인들은 이념에 따라 시대를 눌러온 역사의 굴레와 강박을 느껴오며 살아왔다. 혹자는 진심으로 반성하기도 했지만, 또한 많은 사람들은 역사를 단순히 잊고 싶어했다. 좌우의 대립 속에서 과거에 대한 시각은 비난과 침묵의 극단을 달렸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어느덧 스스로 하나 둘씩 그 시대의 어두운 기억들을 아우르고 과거에 대한 타협점을 모색하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모습이 느껴졌다.
『게걸음으로 가다』에 담긴 메시지는 무엇인가
귄터 그라스는 바로 이러한 변화를 상징하는 행동에 나선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서 현대 독일에서 뚜렷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엄존하는 세대간 역사적인 갈등의 벽을 형상화해냈다. 부모 세대에서 청산하고 아우르지 못한 과거는 뒷 세대에게도 끊임없는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현실을 고발했다.
작품 속에서 구스틀로프 호의 멍에를 짊어진 파울은, 결국 아들 콘라트와의 단절을 치유하기 위해 주변의 여러 사람들의 힘을 빌리려 한다 — 이전 세대인 어머니 툴라나 여러 다른 친구들의 힘을.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도움으로 극복될 수 있는 아픔이 아니었다. 그들 자신이 스스로의 멍에를 인정하고 노력할 때만이 해결되는 것이었다.
귄터 그라스는 어두운 기억이라는 이유로 상처를 더 이상 떠넘기고 미뤄서는 안됨을 보여주고 있다. 세대간에 서로가 묻어왔던 과거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하고 애정을 회복함으로써만 작금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은 구스틀로프 호의 참상이라는 단순한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독일인들의 이야기이다. 9천 명 이상이 죽어간 동부 독일인의 비극을 가지고 독일의 죄를 변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비극이 현대 독일에 남겨놓은 깊은 상처를 멀리멀리 날려버리려는 살풀이 한마당인 것이다.
이제 눈을 돌려 우리 주변을 살펴보자. 친일파들의 멍에, 한국전의 멍에, 월남전의 멍에, 군사독재시대의 멍에 등 그 많은 역사적인 멍에 속에서 숱한 설전이 여기저기서 오고 간다. 부모세대, 선배세대와는 또 다른 20대 중반의 홈지기 또래가 결코 쉽게 알 수 없는 의식이 있고, 또한 산소학번2같은 후배세대들과는 다른 시대의식이 존재함을 느낀다. 필자에게 귄터 그라스의 『Im Krebsgang』은 결코 멀리 독일만의 이야기로 들려오지 않는다. 그것은 격변하는 시대를 살아온 모든 이들에게 역사 속의 인간이란게 무엇인지에 대한 의미심장한 화두였다.
끝으로 이 책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고자 한다. 거장 귄터 그라스가 역사의 숙명과 끝없는 노력을 촉구하는 메아리가 가슴에 남아 진동함을 느끼며……
Das hört nicht auf. Nie hört das auf.
그것은 그치지 않는다. 결코 그치지 않는다.
6년이 지나도록 과거와 현재를 오고가며 갈등에 시달리고 있는 한국 사회를 볼라치면, 홈지기는 여전히 독일의 1980/90년대 Historkierstreit 수준에도 못 미치는 담론이 오고가는 현실이 느껴진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작금의 현실에 매몰되어 있는 모습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보다 넓은 시각으로 접근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지금의 우리처럼 극과 극을 달리는 논의 속에서 조금씩 나아가, 갈등의 본질을 점점 깨달아가고 타협을 시도해가는 시대를 준비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홈지기는 구스틀로프 호의 참사와, 거기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개된 독일 사회의 갈등과 논의, 해결 노력들은 단순히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결코 그치지 않는 공통의 고민이 숨어 있으며, 적지 않은 해법의 실마리도 담겨 있다고 믿는다. 이 좁은 참호 속에서 먼 세상을 두루("peri-") 바라보며("skop") 다양한 문제를 공감하고, 또 치열하게 더 많은 고민을 해나가는 분들이 많아지길 바랄 따름이다.
이 가을의 초입에서, 독일의 과거 비극과 그라스의 짧은 소설, ZDF의 영상 트리오와 함께 작금의 한국 사회에 대한 사색에 빠져봄은 어떠실런지?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 역사가논쟁을 불러일으킨 핵심 사건 중의 하나가 안드레아스 힐그루버의 발언이었다. 힐그루버는 대전 말기 고향에서 쫓겨난 동부 독일인들의 비극이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의 고통과 비견될 수 있다는 취지로 이야기했다.
- 벌써 유행이 지난지 오래되어 잊어버리신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02(O2)학번을 부르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