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사유와 “풀”의 사유로서의 시들
김백겸(시인, 웹진 시인광장 主幹)
- 김행숙「포옹」( 계간 『서시』 2008년 겨울호)
- 김 산 「월식」( 계간 『문학마당』2008년 겨울호)
- 서영처「숲새」( 계간 『시로 여는 세상』2008년 겨울호)
- 심보선「잎사-귀로 듣다」(계간 『문학·선』2008년 겨울호)
- 이영옥「 물방울의 역사」(계간 『시작』2008년 겨울호)
- 김연아「모래시계가 있는 방」(웹진 『시인광장』2008년 겨울호)
- 이성목「한지에 수묵」(계간 『시로 여는 세상』2008년 겨울호)
- 이재훈「대황하」(계간 『딩하돌하」2008년 겨울호)
- 이정란「너에게만 읽히는 블로그의 태그」(계간 『시로 여는 세상』2008년 겨울호)
- 김성규「수열」(계간 『시와 사상』2008년 겨울호)
- 박정대「슬라브식 연애」(격월간 『유심』200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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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로서 사유배경을 서양에 두느냐 동양에 두느냐의 입장은 기호와 공부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서양사상사를 과거에 주마간산으로 일독을 한 바는 있으나 나는 동양사상을 더 선호한다. 서양의 최신사유라는 것도 알고 보면 불경이나 노장에 이미 들어가 있는 개념인데 지금시대의 용어로 말만 바꾸어 심오한 척 하는 서양이론들이 싫어서 가급적 안 쳐다보기로 작정하고 있다. 주위 문인들이 인용하는 작가중 라깡은 좀 읽어보았으나 들뢰즈는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나희덕 시인이 대전의 백북스 클럽에 초대되어 강연을 하면서 요즘 읽은 책으로 질.들뢰즈와 클레르 파르네의 『디알로그』를 언급했다. 나 시인이 입문서로 괜찮다고 해서 “그래, 이 책을 읽어보고 괜찮으면 『천개의 고원』과 『차이/반복』도 읽어보자” 작정하고 주문해서 읽어보니 이 작가는 사유에 반골기질이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들뢰즈는 헤겔 데카르트 마르크스 프로이드 같은 정치질서의 지배사유를 싫어하고 스피노자 흄 베르그송 니체의 사유를 지지한다. 들뢰즈는 삶/생명을 숭배와 생성을 위한 ‘유목민 사고’와 ‘풀의 사고’를 케이스로 들었는데 기존의 지배담론에 대한 ‘중간, 사물의 틈, 존재의 사이, 간주곡’을 의미하는 리좀(Rhizome)의 개념을 도입한 점은 그런대로 흥미로웠다.
어떤 이론도 현실을 떠난 모델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관점에서는 들뢰즈도 약점이 있다. 정착민이 아닌 유목민의 삶을 이상향으로 하고 있으나 내 생각에 인류의 삶은 법과 자본의 질서아래 중세의 농노를 연상케하는 정착민으로서의 삶이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땅이 없으면 존재기반이 무너지는 농노처럼 현대인은 자본이라는 토지의 부양이 없으면 삶의 유지가 불가능하다.
이상을 위해 현실세계의 벽을 넘어야 하는 작가들의 사유와 삶에는 ‘유목민’의 삶이 매력이겠으나 현실인에게는 다소 낯선 개념일수도 있다. 들뢰즈는 ‘지배질서’로서의 ‘나무’사유를 비판한다. 나에게는 차이를 위한 비판으로 들리며. 들뢰즈의 ‘풀’사유 못지않게 나에게는 ‘나무’의 아름다움이 어필한다. 인간의 지배사유 모델에 ‘나무’모델이 들어온 이유는 나무가 현실의 삶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원숭이로부터 인간으로 진화한 다윈의 이론이 맞다면 인간의 유전자에는 ‘나무’존재가 혈연과 피의 관계처럼 각인되어 있다. ‘풀’은 곤충이나 초식동물의 무의식에 더 어울린다. ‘나무’와 ‘풀’ 둘 다 세계를 해석모델이자만 내 해석으로는 ‘나무’가 인간에게 더 심미적인 모델을 제공한다. ‘풀’이 중요했으면 ‘에덴 신화’에서는 ‘생명나무’대신 ‘생명 풀’이 사머니즘에서는 ‘세계나무’대신 ‘세계 풀’이 등장했어야 맞다. 장황하게 인용했으나 계간비평을 위해 내가 고른 시들이 들뢰즈의 ‘풀’의 사유에 다가있는지 ‘나무’사유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다
1. 김행숙과 김산
포옹
볼 수 없는 것이 될 때까지 가까이. 나는 검정입니까? 너는 검정에 매우 가깝습니다.
너를 볼 수 없을 때까지 가까이. 파도를 덮는 파도처럼 부서지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우리는 무슨 사이입니까?
영영 볼 수 없는 연인이 될 때까지
교차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침묵을 이루는 두 개의 입술처럼. 곧 벌어질 시간의 아가리처럼.
-김행숙(〈서시〉, 2008년 겨울호)
월식
촉촉하게 달뜬 그녀의 몸에 나를 대자 스르르 미끄러졌습니다. 나의 첨단이 그녀의 둥근 틈 앞에서 잠시 망설였지만 말입니다. 그녀가 열었는지 내가 밀고 들어갔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사르르 눈앞이 캄캄해진 것을 보면 붙어먹는다는 거,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최초의 일이 다 그렇습니다. 그 다음은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만,
-김산(〈문학마당〉, 2008년 겨울호)
김행숙의 「포옹」과 김산의 「월식」은 연인들의 사랑을 주제로 썼다. 김행숙은 사랑하는 대상과의 合一이지만 ‘사이’를 내포한 불화의 감정을 말했고 김산은 合一이지만 제목「월식」처럼 곧 떨어질 미래시간의 슬픔까지 암시했다. 에로스/인간은 생명의 번식을 위해 연인/배우자와의 합일을 추구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온 모델처럼 신/합일의 완전존재가 될 수 없는 인간/분리의 불완전존재로서 살아간다. 에로스는 불완전한 인간의 완전에 대한 갈망이며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다. 대대손손 작가들이 좋아하는 문학의 반복주제이다. 들뢰즈는 생성으로서의 ‘에로스’와 ‘증식’으로서의 욕망이 삶의 기본모습이며 “결핍‘으로서의 욕망과 ‘타나토스’의 개념을 비판한다. 김행숙의 「포옹」은 ‘욕망’으로서의 에로스와 ‘결핍’으로서의 에로스를 동시에 바라보고 있다. 내 판단으로는 ‘나무’와 ‘풀’의 사유가 동시에 혼합되었고 김산의「월식」은 ‘증식’으로서의 에로스에 더 비중을 두고 썼다. 들뢰즈의 ‘풀의 사유’에 해당하겠으나 「월식」을 합일의 쾌락으로만 보는 독자와 「월식」이후의 시간까지 유추하는 독자의 시선(내 입장)이 다를 수 있다. 적극적 재창조로서의 내 감상은 ‘풀’의 사유 뒤에 ‘나무’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고 해석한다(들뢰즈는 ‘해석’대신 느껴야 한다고 주장할 터지이만).
2. 서영처와 심보선
숲새
Ⅰ
새는 나무가 꾸는 꿈
새를 품은 나무는 지저귄다
수만 개 부리로 지저귄다
새는 나무의 영혼
나무는 새들이 잠드는 푸른 봉분
나무는 훨훨 날아오른다
흰 새들이 나무 위에 피어있다
새는 나무가 낳은 아이들
소란하게 떠들며 몰려다닌다
Ⅱ
새벽 숲에 들어서자 나무들
몸 깊숙이 부리를 묻고 외다리로 줄지어 서 있다
나무들은 진작 조류로 분류되어야 했다
다리 묶인 새
땅에 매인 새
태양이 내부를 비추자
나무는 푸드덕거리며 깨어난다
쫑긋거리는 귀, 지저귀는 부리, 반짝거리는 눈
숲이 들썩거린다
소란한 고요와 섬광 같은 순간,
새들은 날아오른다
수천 마리이며 한 마리인 새,
-서 영 처 (시로여는세상, 2008년 겨울호>
잎사-귀로 듣다
매혹의 순간을 고대하며 앞으로 나아갔노라
사랑은 모든 계획에 치밀하였노라
화해와 호감이 가득한 꿈속에서
너는 내게 물었다
나무들은 잎사-귀가 너무 많아요
바람소리를 어떻게 견딜까요
너의 어리석음도
구름의 한계 안에서는 당당하여라
사랑은 삻을 과장하니 좋아라
너는 고풍스런 잠언이 배인 표정으로
잠이 들었고 어리석고
어리석었던 나는
불가피한 내일의 파국을 떠올렸고
내가 울기 전에
네가 먼저 운다는데
이별과 재회 중에 하나를 걸었노라
잠에서 깬 너는 말했다 꿈속에서
나는 나무였고 당신은 바람이었고
나는 당신의 노래를 백 개의
잎사-귀로 들었지요
먼저 운 것은 결단코
나였다 다음 생에 다시 만나리라
- 심 보 선 (문학선, 2008년 겨울호)
들뢰즈는 ‘나무의 사유’란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꼭대기를 이루는 구조라고 갈파했다. 가지는 중심(근원, 신)에서 펴져나간 사물/인간의 제도와 문화의 은유로 보았다. 그는 ‘위계적 시스템 혹은 명령의 전송’으로서의 제도권의 사유를 비판한다. 기존의 문화란 ‘과거와 미래, 온전한 역사, 진화, 발전’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작가란 “풀의 사유“로서 뿌리가 아닌 ‘리좀’(위에서 언급)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작가란 사유의 숲에 종(種)과 속(屬)이 아닌 군(群)을 만들어서 ‘점이 아닌 선’으로서 사물들 가운데 사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작가도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작가가 그래야 하는가?. 문자이후 만년, 고등종교의 출현이후 약 오천년동안 이어져온 신화와 종교의 사유체계는 현대에서 무용지물인가? 경전(Canon)은 찢어버리고 박물관과 미술관과 고전작품들은 역사의 유물로 묻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을 가지면서 서영처의 「숲새」와 심보선의 「잎사-귀로 듣다」를 읽어본다.
「숲새」는 나무와 새의 고전적인 관계를 설정했다. 나무/몸과 새/영혼의 구조로 나무=새 인 존재의 기쁨을 노래했다. ”태양이 내부를 비추자/나무는 푸드득 거리며 깨어난다“는 표현으로 생태환경과의 조화와 우주내 생명의 발화를 얘기한다. 이 세계는 全一의 관계이며 ‘一卽多 多卽一’의 세계인데 “새들은 날아오른다/수천마리이며 한 마리인 새”의 결어가 이를 상징한다.
「잎사-귀로 듣다」는 나무/주체와 바람/타자의 관계 상황을 말하고 있다. 시인은 이 세계를 ‘꿈’으로 보고 있으며 사랑에 빠진 주체/인간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꿈속에서/나는 나무였고 당신은 바람이었고/나는 당신의 노래를 백개의/잎사-귀로 들었지요”라는 언술로 사랑이란 존재에의 귀 기울임이며 관심임을 말한다. 이별 상황을 대조했으나 사랑의 깊이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이며 이별/사랑이란 “화해와 호감이 가득한 꿈속”의 사건이다. 결국 세계내 존재의 기쁨을 말한 詩 로 해석할 수 있다.
들뢰즈의 관점에서 이 시들의 대상은 나무를 노래했으니 ‘原點과 씨앗 혹은 중심’사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까? 시의 구조로는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내용은 ‘나무-되기’ 에 시인의 감각이 집중되어 있다. “나무”와 “새” 사이, “나”와 “너”사이, “꿈”과 현실 사이로는 시인의 기쁨이 ‘증식’되어 ‘도주선’을 그리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면 이 시들의 사유는 ‘풀’인가 ‘나무’인가? 시에서는 사유방법이 아니라 작가의 表現의 아름다움이 더 문제가 아닐까?
3. 이영옥과 김연아
물방울의 역사
연잎에 떨군 물방울이 맑은 구슬로 또르륵 굴러가는 것은
연잎에 스며들지 않도록 제 몸 고요하게 껴안았기 때문이다
오직 꽃 피울 생각에 골똘한 수련을 건들지 않고
그저 가볍게 스치기만 하려고 자신을 정갈하게 말아 쥔 까닭이다.
그러나 물방울의 투명한 잔등 속에는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포자들이 출렁거렸는지
수 만 갈래의 흩어지려는 물길을 달래며 눈물의 방을 궁굴려 왔는지
깨끗하다는 말 속에 숨은 외로움은 왜 그리 끔찍했는지
물 위에 닿는 순간 물방울은 잠시 흔들렸던 세상을 먼저 버리기 위해
옴 힘을 다해 부셔진다 흔적 하나 남기지 않는 가장 아픈 방법으로
-이영옥(시작, 2008년 겨울호)
모래시계가 있는 방
그가 오래 비워둔 방에 들어섰을 때
거울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머리맡의 모래시계는 천상의 시간을 비우고
지상에 무덤 하나 만들어 놓았다
그는 부러진 늑골로 누워 있었다
문병 온 사람들은 늘어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에게서 그는 죽어가는 자신의 시선을 보았던가?
어디에도 가닿지 못하는 시선은
남은 불빛을 하나씩 꺼나갔다
모래시계에 갇힌 지평선은
검은 구멍으로 흘러내렸다
시간은 그의 입에 모래를 부어넣었다
모래 흐르는 소리 이명처럼 울리고
눈썹 위로 지평선이 올라가겠지
그는 어디로도 떠나지 않는 여행을 할 수 있을까?
더 이상 누구도 아닌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태양과 바다를 오가는 구름처럼,
언제나 다시 태어나는 자에게
죽음은 잠을 완성시킬 뿐이다
죽은 가지 끝에 눈을 틔우는 봄처럼
그는 이 지상에서 몸을 일으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몹시 더운 방 너머, 눈 덮인 저 길 너머로
시간은 오래 흐르고 흐르리라
모래시계가 만든 무덤, 누가 뒤집어 놓을 것인가?
천상의 시간을 지상에 펼쳐놓는 사막에서의 밤처럼,
모래시계는 비어있는 시간에 다시 젖줄을 댈 것인가?
-김연아 ( 웹진 『시인광장』, 2008년 겨울호)
이영옥의 「물방울의 역사」는 화자/물방울/존재의 일생을 말하고 있다. “물방울”과 “연잎”과의 ‘이항대립’에서 화자/물방울은 타자/“꽃 피울 생각에 골똘한 수련”을 가볍게 스치기만 하고 물/죽음/실재계로 돌아간다. ‘물방울은 물에서 나와 물로 돌아간다’는 존재의 순환구도를 말한다. 삶/존재의 유한기쁨을 드러낸 화자/물방울과 타자/수련과의 에로스적 긴장이 처리된 은유는 너무 청교도적이다. 시인의 인생관이 반영되었겠지만 “깨끗하다는 말 속에 숨은 외로움은 왜 그리 끔직했는지”같은 표현이 아름다우면서도 독자의 마음을 끔직하게 몰아간다. “물방울”과 “수련”사이에 들뢰즈식의 ‘도주선’이 발생하였을까? 새로운 ‘생성’으로 나아갔을까? 내 생각엔 ‘생성’이 아닌 ‘귀환’과 ‘퇴행’이 발생했다. 그러나 물/죽음/실재계로 돌아가는 큰 상징 때문에 시의 구조는 큰 스토리를 말하고 있다. 작은 ‘생성’보다는 큰 ‘이야기’가 더 아름답다.
김연아의「모래시계가 있는 방」도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장소는 “모래 시계”가 있는 병실이다. 모래시계가 병실에 왜 비치되어 있는지 현실이유는 묻지 말고 작품의 상징성을 높이기 위해서 작가가 배치한 구도라 이해하자. 김연아는 “모래시계”의 시간이 인간시간의 은유임을 내세운다. 작가의 생각에 “시간”이란 “천상의 시간”에서 “지상의 무덤”을 향해 흐르는 강물/“구름”이다. 모래시계는 가운데 “검은 구멍”을 통해 저 세상의 시간과 지상의 시간을 교환/순환 하는 구조의 은유이다. 4차원시공간의 물리학적관점에서는 시간이란 실제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한다. 인간의 존재인식이 시간이 흐르는 것으로 인식하는데 이 존재조건은 인간의 입장에서는 절대운동이므로 동양에서는 運命으로 파악한다. “모래시계”에 갇힌 인간의 시간/존재태는 나고 병들고 죽는다. “모래시계”는 한 인간이 시간이 끝나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순환을 말했으나 화자는 “모래시계가 만든 무덤, 누가 뒤집어 놓을 것인가?”는 언술로 윤회의 암시와 인간의 불안을 동시에 드러낸다.
「물방울의 역사」와 「모래시계가 있는 방」도 나무 사유/구조에 뿌리를 둔 인간의 원형적인 세계인식를 드러낸 시로 보여진다. 「세계목」으로서의 나무시간은 천상과 지상의 시간을 매개하며 “모래시계”와 “수련”은 잠재태인 「세계목」의 다른 은유이다.
4. 이성목과 이재훈
한지에 수묵
봄비 슴슴한 날이다. 젖은 땅에 산그늘 번져들더라. 어느 여백에 들까 궁리도 끝나지 않은 사이, 눈물 한 방울 떨어뜨렸으니 어쩌겠는가.
묽은 밤이 오는 것이더라. 어둑한 마당에 흰 꽃잎 날고, 빛들이 고요히 눈물에 닿아 번져가더라. 너무 멀리 번져가서 마음 희미해졌으니 어쩌겠는가.
날이 가니 색이 멀어지던가. 생살 붉은 저녁의 별리도, 아침이면 붓끝에 묻어나지 않는다. 색을 버리고도 못 버린 몸이, 몸에 겹쳐 파묵이 되고 다른 몸으로 번져 발묵이 되는 것을 어쩌겠는가.
백발이 성성한 날 기다려지더라. 한없이 늙고 늙은 끝, 당신의 여백으로 스며드는 나를 맞이하고 싶더라. 있고 없는 것이, 들고 나는 것이 모두 세상의 한 폭인 것을 어쩌겠는가.
-이 성 목 (〈시로 여는 세상〉, 2008년 겨울호 )
대황하 10
취하리라. 저 물에 취하리라. 자동차를 타고 계단을 오르고 집에 들어누으리라. 노을의 냇내를 풍기며 그대에게 안기리라. 늙은 사람과 만나 술 한 잔에 취하리라. 지혜의 말에 취하리라. 새로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리라. 푸른 초원을 달리리라. 소리를 지르리라. 그러나 그리워하리라. 그러나
웃으리라. 그대의 아들을 안고 웃으리라. 그대의 주검을 안고 웃으리라. 떡을 먹고 살리라. 살기 위해 길 끝의 집으로 돌아가리라. 그곳의 법을 버리리라. 새들을 모으고 노래를 부르리라. 기도하고
울리라. 그물처럼 집 위에 눌러 앉은 햇살에 몸을 누이리라. 눈을 감으면 폭우가 내리리라. 빗물이 얼굴에 상채기를 내리라. 취하리라. 피가 흘러내리는 저 물에 취하리라.
- 이 재 훈 (〈딩하돌하〉, 2008년 겨울호)
들뢰즈는 사물은 ‘「시작, 기원이 아닌」 중간’에서만 살아 움직인다고 말한다. 철학이나 종교의 도그마가 추구하는 ‘제 1원리는 언제나 가면’이라고 비판하며 ‘사물들은 오직 제 2, 제3, 제4의 원리 수준’에서 살아 움직인다고 말한다. 이 말은 사유의 중심점을 지금 현재에 놓아야 한다는 강조로 들린다. 내 생각에 가면이지만 ‘제 1원리’의 절대성을 부정하고서는 ‘제 2, 제3, 제4의 원리’가 성립하지 않는다. 과거의 철학자들과 종교창시자들이 ‘제 1원리’에 수 천년동안 매달린 이유는 지금 현재의 사물들의 ‘시원과 근거’가 없이는 세계존재를 설명할 수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과거문화의 세례와 지금 현재의 직관에 의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나 어떤 작가들은 창작품을 세계의 재현으로 보며 작품의 창조란 世界態의 창조라 믿는 사람도 있다. 이성목의 『한지에 수묵』도 이런 창조의식이 드러난 작품이다. “한지”는 세계의 축약이고 붓으로 그리는 그림은 화자의 인생에 대한 은유이다. “눈물 한 방울”은 창조자/작가가 세상에 간섭한 행위이다. 새로운 창조가 일어난 ‘점’으로서의 “눈물 한방울” 때문에 “묽은 밤이 오는 것이더라. 어둑한 마당에 흰 꽃잎 날고, 빛들이 고요히 눈물에 닿아 번져가”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러나 창조자/작가는 세계내 존재이며 “있고 없는 것이, 들고 나는 것이 모두 세상의 한 폭”이라는 한계상황에 갇힌 자이다. ‘점’/화자와 ‘화폭’/세계의 긴장관계를 드러냈는데 역시 들뢰즈의 ‘나무 사고’에 해당한다.
이재훈의 『대황하』는 표현으로만 보면 들뢰즈의 ‘유목민’사고에 해당한다. ‘유목민’ 사고란 ‘영토’에 뿌리내리지 않으며 구조로서의 ‘나무’사이를 질러나가 증식하는 ‘풀’의 ‘도주선’을 의미한다. 상황에 영향을 주고 상황에 의해 생성되는 ‘이중포획’으로서의 삶 자체를 중요시한다. 지금여기의 희로애락이 삶이며 ‘시작과 끝’이 있는 구조/문화는 삶의 억압기제로 본다. 자유주의자의 생명사상처럼 들리기도 한다. 『대황하』는 삶의 자유란 흐르는 강이면서 항상 지금 여기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강물의 속도에 따라 화자의 감정도 상승/발산한다. “살기 위해 길 끝의 집으로 돌아가”고 “그곳의 법을 버리”고 “새들을 모으고 노래를 부르리라”고 화자는 노래한다. 들뢰즈식의 ‘강-되기’가 이루어졌는지는 모르겠으나(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형식상으로는 들뢰즈의 논리가 반영된 시다. ‘풀’사유에 해당한다고 판단한다. ‘풀’이란 초원을 강물처럼 흘러 미지의 세계로 가는 존재이므로.
5. 이정란과 김성규
너에게만 읽히는 블로그의 태그
애인아
두꺼운 전화번호부 두 권의 갈피갈피를 서로 맞물려 놓고 대형트럭이 양쪽에서 아무리 당겨도떨어지지 않는 걸 보았다. 쉽게 찢어질 낱장들의 허약함을 알지만,
애인아, 그 정도 자력은 있어야 사랑하지, 사랑이지
無名草
부두에서 잠 배를 놓치고 A4 종이못에서 낚시하고 있는데 퐁당 소리가 난다. 살펴보니 머리카락몇 가닥이 빠졌다. 저울에 올렸더니 바늘이 어느 결에 360도 돌고 나서 시치미 딱 떼고 O 가운데에 숨어 있다.
무명초가 이리도 무거워지는 새벽이란, 시간의 새 벽에 부딪쳐 느닷없이 안기는 오늘이라니.
수도적
꽉 잠겨 있던 수도꼭지를 힘주어 돌리자 사방으로 물이 튄다. 너무 오래 많은 걸 머금고 있었다. 글을 쓰다 수동적을 수도적이라고 잘못 쳤다.
스스로 분출할 수 없으니 수도가 수동적인 건 명백한 일. 녹물은 핏물과 다르지 않지.
믿음
유리 파편이 박힌 것처럼 발뒤꿈치가 아팠다. 며칠 견디다 작정하고 돋보기를 들이댔다. 머리카락이 박혀 있었다. 1밀리미터쯤 될까.
불신 한 가닥이 믿음의 몸체를 찔러 파열시키는 순간처럼 놀랍다.
조각
아기 손바닥만 한 조각을 들고 고고학자가 흥분해서 소리친다. 새로운 빗살무늬토기를 발견했습니다! 아무렴, 산산조각으로 깨졌어도 토기는 토기, 나는 나.
물방울은 강이 아니지.
-이정란 (「시로여는 세상」, 2008겨울호)
수열
1.나무-하늘에서 내려온 사다리. 사람은 태어날 때 나무를 밟고 지상으로 내려오며 죽은 후
에는 다시 나무를 밟고 영혼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한다. 죽은 혼을 부를 때 무당들은 나무
를 흔들어 영혼을 깨우기도 하며 나무에 직접 올라가 영혼을 온몸에 가득 채우고 내려오기
도 한다.
2.하늘-무한한 침묵으로 열려있는 공간 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3.잠-죽음으로의 여행.
4.돼지-할머니가 죽기 전에 먹고 싶었던 과일.
5.옷-언젠가는 더렵혀질 물건, 사람들은 그것을 자주 빨거나 새로 만들려고 애쓴다. 그것을
어떻게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6.홍수-평소에 조용하던 아이가 화나면 얼굴이 빨개지고 성이나 한꺼번에 울음이 터지는 장
면.
7.배-화를 피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 언젠가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면 배를 타고 도망가거나 화가 가라앉길 기다리는 방법밖에는 없다. 이런 지혜를 누군가 수천 년 전에 일러주었고 나는 어릴 때 얼음으로 만든 배를 타고 자주 도망가는 연습을 했던 적이 있다.
8.고구마-달아나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말, 돌아오지 말았으면 싶은 말, 돌아왔으면 하는 말. 할머니가 날마다 잊어버렸으면 하던 노래.
9.창문-앉아있을 때의 날개는 검지만 날아오르는 순간 날개의 색깔이 파랗게 바뀌는 새의 이름. 자주 날개를 펼치고 날아다니지만 누군가가 보고 있을 때는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는다. 나는 가끔 집에서 창문이 날개를 펼칠 때까지 바라보고 있을 때가 있다. 당연히 그 새의 검은 날개밖에는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언젠가 내 눈앞에서 그 새가 푸른 깃털을 보여줄 때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10.공-굴러다니기 위해 태어난 동물. 나무를 타고 내려왔는지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음. 그러나 이 동물도 굴러다니다가 결국 하늘로 뛰어 올라간다.
1+2+3……9+10
할머니는 나무를 밟고 내려와 나무를 밟고 나무 위로 올라갔다. 무한한 침묵의 공간인 하늘
로 잠을 자러 간 것이다. 죽기 전에 돼지고기 한 근이라도 먹었으면 좋았을 걸, 더러운 옷을 입고 이 세상을 뒹굴다가 가신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동생은 자주 울었고 집 앞의 강이 화를 내었다. 그러나 우리 집은 배가 없었고 타고 날아갈 새 한 마리 없었다. 결국 어린 나는 공이나 차며 흙 묻은 옷을 입고 운동장을 뒹굴면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어른이 된 이후에도 나는 공을 차며 놀고 내가 뛰어다니고 있는 운동장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점점 알아가고 있다. 나 또한 할머니처럼 그렇게 세상을 뒹굴다가 나무를 밟고 그 뒤를 따라갈지 모르겠다.
-김성규(「시와 사상」, 2008년 겨울호)
새로운 형식의 시는 일단 이해하는데 공을 들여야 한다. 눈에 익지 않으니 새로운 독법을 개발해야 한다. 은유가 재미있어서 두 시를 골라보았다. 작은 제목이나 번호를 붙인 글들이 전체화폭에서 어떤 구도와 풍경을 그리고 있는가를 생각해본다. 표현주의 화가 샤갈의 그림처럼 그림안의 부분 이미지들은 각자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으며 전체 풍경을 구성하고 있다.
이정란은 『너에게만 읽히는 블로그의 태그』라는 제목에서 작은 제목의 글은 본문의 꼬리말이며 태그(tag)가 생략한 본문을 읽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생략한 본문이 무엇인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겨야 한다. 은유와 환유로 이루어진 작은 글들은 빛나는 구절을 보여주고 있으나 작가가 생략한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들뢰즈의 글쓰기 전략인 ‘배치’로서 이 작품을 이해하자. 들뢰즈는 ‘배치’란 ‘동질적이 않은 집합의 요소들이 협동하게끔 만드는 것...공동-작동, 공감, 공생’이라고 정의했다. 임의의 문장이나 發話를 배치한다고 공감 공생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작가는 이질적인 이미지나 스토리를 배치하되 각 요소는 ‘몸체들의 노력이나 침투, 사랑 혹은 증오’로 공감을 이루어야 한다.
이정란은 일상적인 사물을 일상적이지 않은 시선으로 잡아내고 독자로 하여금 지평선 너머 풍경(본문)을 보도록 요구한다. 사물에 작동하는 공감의 침투력은 시인의 암시력과 독자의 상상력에 비례한다. ‘배치’로 낯선 풍경을 만들고 사물과 사물사이로 ‘도주선’을 만드는 들뢰즈의 글쓰기 전략에 형식적으로는 부합한다.
김성규는 1에서 10까지의 수열에 작은 스토리를 부여하고 마지막 연에서 수열의 조합인 전체스토리를 종합하고 있다. 각자의 이야기는 부분이 모여 종합을 이루는 형식이므로 ‘나무’사고에 해당한다. “할머니”의 일생을 소재로 하고 ‘사머니즘’의 ‘세계목“이 첫 연에서 등장한다. 시간이란 ’나무‘상징처럼 하늘에서 지상으로 드리워진 시간이며 인간은 하늘과 지상의 시간을 윤회하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슬픔은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할머니“의 시간이 스민 ”돼지“
“옷” “고구마”와 화자의 시간이 스민 “홍수” “배” “창문” “공”은 서로 얽히고 관계를 만들어 냄으로서 화자의 유년과 할머니의 시간이 스민 추억을 이미지로 그려냈다(샤갈의 〈나와 마을〉풍경을 보는 것 같다). 감정을 숨긴 채 드라이이한 이미지와 스토리로 그려내는 기법들은 테라야마 슈우시의 시들에서 선보인 바 있다. 요새 젊은 시인들이 이 수법에 암시받은 작품들을 쓰는 것을 가끔 본다.
6. 박정대와 조연호
슬라브식 연애
흑맥주를 마시는 캄캄한 밤, 강원도 내륙 산간 지방에 내려진 폭설주의보
바람이 컴컴한 하늘을 끌고 내려와 민박집 처마 끝에 당도했을 때 나는 나타샤의 살결처럼 하얗게 피어날 폭설의 밤을 생각한다, 슬라브식 연애를 생각한다
나는 연애지상주의자, 지상에서 밤새도록 펼쳐질 슬라브식 연애를 생각한다
그러니까 폭설은 사흘 밤낮을 퍼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묵고 있는 민박집의 아리따운 그녀는 세상이 더러워 세상을 버리고 산골로 들어온 고독한 여인이어야 하는 것이다
흑흑, 흑맥주를 마시는 밤은 아주 캄캄하고 추워 지금 내 마음의 내륙에 내려진 폭설주의보
그러니까 그녀와 나는 폭설에 의해 고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너무나 추워 서로의 체온이 간절해져야 하는 것이다
아무 말 없이 체온만으로도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태양의 반대편으로 우리는 밤새 걸어가는 것이다
그 끝에서 우리가 태양이 되는 것이다
인생은 한바탕의 꿈이라 했으니, 그녀와 나는 끝끝내 꿈속에서 깨어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함께 흑맥주를 마시며 캄캄하게 계속 따스해져야하는 것이다, 천일 밤낮을 폭설이 내리든 말든 그녀와 나는 계속 밤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녀와 내가 스스로 태양을 피워 올릴 때까지, 그녀와 내가 스스로 진정한 사랑의 방식을 터득할 때까지, 그녀와 내가 스스로 슬라브식 연애를 완성시킬 때까지
태양의 반대편으로 우리는 밤새 걸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서 우리가 태양이 되는 것이다
-박정대(「유심」, 2009년도 1.2월호)
점성(占星)의 성속사(聖俗史)
물결이 오고 있는 곳은 이야기의 끝 약 200페이지 남짓한 지점이었다. 편지는 날아올라 그것을 본 내게 별이 더 이상 비약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게 만들고 있었다.
‘우주가 시작된 곳은 어디인가’하는 질문에 천문학자는 ‘그것은 그것의 내부에서 온다’고 대답했다.
그가 말한 것은 죽은 것을 포란하는 어떤 성조(成鳥)에 관한 것이었다. 수많은 높임말이 쏟아져 나오는 책이 동물의 배태(胚胎) 같았기에 나는 그 책의 산도(産道)를 찾아 새가 날고 있다고 여겼다. 허무한 도서관이 발바닥을 들고 나를 기다렸다. 자침(磁針)의 방향은 허공의 생에게로 향한다.
방충망 틈으로 잔잔한 환역(寰?)이 와도, 잔잔함의 부피는 방충망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흉상의 하체를 닮았고 허탈하게 내 귓전으로 다가올 두 다리를 쥐고 있었으니까. 시간 역시 발바닥을 들고 나를 기다렸다. 선천의 혹은 후천의 애인들에게 사람들은 감격했고, 토론했고, 비탄에 빠졌다.
죽은 동물의 머리 뼈 안에 꿀을 만드는 벌의 이야기다. 서쪽의 별자리는 소변을 모아두는 작은 두개골 같았다. 옥상이 구름을 열광하더라도 잘 찢어지는 종이공예품 같은 성감대는 탓하지는 말자, 사람은 안정과 확신에서 신비를 얻기도 하는 거니까. 밤은 신발처럼 뒤엉킨 우리들의 절종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할머니 저 괴로운 별이 자기 발을 닦아달라고 울부짖고 있어요. 역연(逆緣)의 별에게 오래 물었던 구중청량제를 뱉는다.
또 다른 이야기 <오케아노스의 일곱 딸>에서, 옆집 아저씨가 깨진 망원경에게 “서쪽 하늘에서 만나자”라고 말한 건 너무 슬펐다. 오케아노스의 일곱 자매는 반신(半神)들을 배고, 매일 밤 오줌 누기가 힘들었다. 내 베개는 종종 엄마의 발목 자국을 주먹만큼 자란 여동생처럼 소중히 끌어안고 있었다. 더러 인간을 사랑한 것을 부끄럽게 여긴 별도 있었다. 임신중독, 그것은 밤하늘을 무심한 것으로 상상한 자의 증상이기도 했다.
-조연호( 웹진 『시인광장』, 2008년 가을호)
박정대와 조연호의 시는 로맨티즘의 현대해석을 보여준다. ‘낭만주의’는 외부현실이 아닌 인간의 내면에 진실이 있다고 주장한다. 독일의 슐레겔 형제가 《아테나움》지를, 영국의 워즈워드와 콜리지가 《서정민요집》을 발간하여 시작된 이 운동은 상상력에 의한 우주와의 영적 합일감을 중요시한다. 비 현실의 공간을 중요시한 이 상상운동은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운동까지 이어진다. 낭만주의 자아에 무의식의 영역을 도입하여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공상과 환상의 세계를 노래하는데 박정대와 조연호의 시는 이 계보의 시 정신에 닿아있다. 다만 표현수법에 있어서 박정대는 낭만주의에 조연호는 초현실주의 무의식적 표현에 더 기운 것으로 해석된다.
박정대는 폭설에 갇힌 강원도 민박집의 딸과의 연애를 상상한다. 그 연애는 현실공간이 아니고 “태양의 반대편으로” “밤새 걸어가” “우리가 태양이 되는” 공간이다. 태양은 내면의 빛나는 시간을 상징하고 완전시간은 남과 여(음과 양)의 합일에 의해 도달한다는 ‘유토피아’를 드러낸다. “인생은 한 바탕의 꿈”이라는 생각도 장자의 초월주의에 닿아있다. 박정대의 시정신은 문맥보다도 노래에 가까운 리듬과 운율에 있다. 많은 현대시들이 이미지 홍수의 시들을 쏟아내고 운율이 주는 무의식의 기쁨을 간과한다. 어떤 시들이 생명력이 길지는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조연호의 시는 이미지의 비약이 심하다. 그나마 이 시는 독자들이 신화와 과학의 배경지식이 있다면 상상력을 따라갈 수 있는 시이다. “‘우주가 시작된 곳은 어디인가’하는 질문에 천문학자는 ‘그것은 그것의 내부에서 온다’고 대답했다.”는 언술은 잠언의 형태로도 들린다.
이 시 역시 들뢰즈의 ‘배치’와 쉬르리알리즘의 표현이 혼합되어 ‘진정한 본체란 개념이 아니라 사건이다’라는 들뢰즈의 사유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저마다의 이미지와 스토리를 가진 이질적인 사건들이 있고 작가의 의도적인 배치에 의해서 『점성占星의 성속사聖俗史 』를 조연호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聖과 俗의 긴장이 있는 이야기들이 대립하고 이 사이로 기존의 관념을 무너뜨리는 들뢰즈의 ‘도주선’이 질주하는지는 역시 독자의 상상력에 맡긴다.
7.들뢰즈의 글쓰기 방식에 대한 생각
시인들이 사물에 가 닿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 글은 들뢰즈로 시작했으니까 다시 들뢰즈로 돌아간다. 들뢰즈는 글쓰기에서는 사물사이 ‘도주선’의 절대속도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들뢰즈는 운동이란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층위사이에서 ‘잠재력’의 차이에서 생겨난다고 말한다. ‘현상을 풀어주거나 방출하는 것’은 강도의 차이라 설명한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물리학에서 차용한 개념이었다. 모든 사물은 +전하와 -전하를 띄고 있고 두 개의 극성사이에 힘의 자장이 성립하며 운동이 발생한다. 동양이 陰陽관도 같은 개념인데 현상과 운동은 음양의 대위와 상보작용의 결과이다. 운동이란 주체의 운동이 아니라 세계구조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지구가 태양을 돌고 태양계가 은하계를 도는 행성의 운동주체는 행성이 아니다. 공간의 중력장이 휘어져있기 때문에 행성들은 중력장의 구조사이를 돌아다닌다는 관점이 최신물리학의 해석이다. 들뢰즈는 ‘구조’를 배척하고 운동하는 사유정신의 자유로움을 강조한다.
조금 더 진도를 나가 상상력을 발휘하면 세계내 존재는 스스로의 운동이 아니다. 주체는 시공간의 환경구조에 의해(음양의 전위차이에 의해) 길을 간다. 동양에서는 運命이라고 부르는 이 운동은 모든 사물의 본성에 내재해 있다. 세계 내 부분존재(주체)는 자신의 의지대로 운동한다고 생각하지만 주체의 관점이고 타자의 관점에서는 무위자연의 영구순환운동의 일부이다. 이야기가 비약했지만 들뢰즈의 절대속도는 동양의 運命에 해당하는 절대속도를 말한 것 같지는 않다(동양식 사고의 깊이까지 섭렵한 것 같지는 않다는 의문이 든다). 그는 운동이란 ‘시작, 결말’의 목적지향적 해석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생성/되기’로 파악한다. 시공간의 표면에 파도처럼 일어났다가 스러지는 생성/소멸 운동은 보고 있으나(감각의 입장에서) 생성소멸이 일어나는 구조의 문제(사유체계)는 지나간다. 구조주의적 언어관도 비판한다. 구조란 없다고 보는 입장이다, ‘과거와 미래 역사도 없으며 심지어 현재도 없다’고 말한다. 지나가는 생성/운동 만이 있을 뿐. 언어는 감각적으로는 소리와 기호의 생성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구조측면으로 보면 인간이 사막에 세운 가장 오래된 책 피라미드와 형식이 비슷하다(B.C 만년전이라는 가설이 있으며 단어/벽돌은 책과 문명의 가장 쉬운 기초은유이다). 피라미드가 最古의 책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견고한 구조/설계 때문인가? 아직도 무언가를 향해 생성중이기 때문인가? 들뢰즈는 어떻게 대답할까? 작가/인간이 감각의 한계를 넘어서 견고한 구조물서의 문화/문명/사유체계를 시간 속에 구축하고자 하는 욕망은 삶의 생성/소멸-부재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욕망이다. 여기 언급한 시들과 들뢰즈의 『디알로그』는 아마도 천년을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만년 전의 책을 보면서 나는 아직까지 살아남은 고대인간의 정신을 감탄한다. 나는 내 시가 피라미드 같기를 기원한다. 순간에 사라지는 생성/소멸의 꽃과 같은 일회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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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백겸 시인
- 충남대학교 경영학과와 경영대학원을 졸업
-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기상예보”가 당선되어 등단
- 현재 ‘시힘’,‘화요문학’ 동인
- 한국작가회의 대전.충남회장, 한국시인협회회원
- 웹진 『시인광장』主幹
- 한국원자력연구원 감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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