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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아, "수주 변영로 아내의 항변"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1. 12. 28.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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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아, "수주 변영로 아내의 항변"
'수주'하면 말술도 마다하지 않는 술꾼이 아니요?
2010년 10월 25일 (월) 13:06:46 최미아 miacc@hanmail.net

최미아(수필가· 전 부천수필가협회장)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수주 변영로의 시 <논개>의 첫 연입니다. 여고시절 국어시간에 이 시를 배웠습니다. 시의 성격은 민족적, 상징적이고 표현방법은 대조법, 영탄법이라는 식으로 시험에 나올 내용들을 공부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교과서에 나온 시들을 전부 암송하게 했지요. 하지만 감수성이 넘치던 시절이라 <논개> 같은 시보다는 서정적인 시를 더 좋아했습니다.

   
▲ 부천 중앙공원에 세워진 수주 번영로 '논개' 시비 ⓒ부천타임즈

그 뒤 부천에 와서 살면서 지역사회의 역사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가 고강동에 있는 수주 선생의 고향집과 산소를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복사골문학회에서 공부를 하게 되면서부터 선생의 글을 접할 기회가 많아지기도 했지요. 나는 선생의 술에 얽힌 글들을 읽으면서 뒷바라지를 한 아내는 어떤 분이었을까 궁금했습니다. 시인의 아내 노릇을 한 부인의 이야기를 해보려합니다.

   
▲ 수주 변영로
많은 분들이 오셨구려. 문학제를 한다기에 와 보았소. 내가 누구냐구요?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의 마누라 양창희(梁昌姬)요. 내 가만 보니 부천에서 수주문학상도 만들고, 수주 책들을 다시 내기도 합디다. 그런데 모두 다 '수주 수주'지 함께 살면서 고생한 내 이야기는 아무도 안하는 거여. '수주'하면 말술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술꾼 아니요? 그 술꾼 마누라로 살았던 내 이야기 좀 하려고 이리 왔소.
 
수주가 "이년아! 썩 내려와라!" 하면서 저쪽에서 달려올 것 같기도 하네요. 만취해 들어오면서 "이년아!" 하고 부르는 것이 나를 부르는 소리였으니까. 그 소리만 나면 밥상에 앉아있다가도 이웃집으로 도망을 쳤지. 그러면 "거기 대가리 허옇게 희고 코 빨간 년 있거든 당장 내쫓아라. 세상에 둘도 없는 악독한 년이다." 하면서 "문 열어주지 마라. 뉘네 집에 가서 어떤 놈하고 자빠졌나보다." 하고 대문을 걸어버렸소.    

 나와 결혼할 때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오. '금주'라고 새긴 은패(銀牌 )하나를 목에 걸고 다녔답디다. 사람들은 "개가 똥을 끊지, 그자가 술을 끊다니 거짓말이다." 하였다는데 6년간이나 금주를 했다니 믿기지가 않지요.

그러다 미국 생활을 하면서 다시 술을 마셨다가, 상처한 후에 술을 다시 끊었답니다. 그때는 신문에다 '금주를 단행한다' 이런 글까지 써서 발표를 했대요. 나와 재혼하고 내가 첫아들을 낳자 득남 자축이란 명목 하에 술을 마시기 시작했어요. 나는 "주정뱅이한테 시집 올 년이 없으니까 교묘한 수작으로 뻔뻔스럽게 신문에다 글까지 내고, 이게 사기결혼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대들었소. 

이런 사람하고 어떻게 결혼을 했냐구요? 그것도 자식 딸린 남자와? 내가 진주 일신여고에 있을 때였소. 김응집(金應集)씨와 구자옥(具滋玉)씨, 우리 사촌오빠까지 나서서 좋은 사람이 있으니 만나보라고 했소. 세 사람이 중매를 선거지. 지금은 나라가 없어서 주정뱅이 시인이지만 나라만 있으면 정승감이라나 뭐라나 하면서, 시인의 아내 노릇을 충실하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자꾸 나를 부추깁디다.

그래 한번 만나보자 하고 만났는데 내가 졸업한 대학의 교수님이지 뭡니까. 사제 간 결혼도 좋으냐고 묻길래 선생님 하실 탓이라고 했더니 약혼식이고 뭐고 번거로운 거 다 그만두고 3일 후에 결혼식을 하자는 거예요. 그렇게 쉽게 결혼을 해버렸소. 쓴맛 단맛 다 빠지고 음식으로 말하면 찬밥덩어리인데 눈에 뭐가 씌었어도 단단히 씌었던거지.

   
▲ 수주변영로문학제 연극공연 ⓒ부천타임즈
나도 선보는 자리에서 얼굴 한번 못 들 정도로 요조숙녀였다오. 내가 음악과 출신 아니우. 가족들이 둘러 앉아 있는 저녁시간, 세레나데를 연주하는 결혼 생활을 꿈꾸기도 했지. 그런데 남편은 쥐꼬리만한 글 좀 쓴다고 친구들과 돌아치면서 허구한 날 술에 취해 있었소. 식구는 남이 난 자식, 내가 난 자식, 떼거지처럼 많은데 가장이라는 작자가 아침 식전부터 술병을 들고 앉아 있다고 생각해보구려. 아침 반주하기 전 맑은 정신으로 있을 때 일장 연설로 분풀이를 하기도 했지.

한번은 칼을 들고 그토록 술에 취해 분간 못하고 살면 어린것들 먼저 죽이고 나도 죽는다고 했더니 앞으로 절대로 술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을 합디다만 며칠뿐이었소. "어디 나 없이 고생 좀 해봐라." 하고 어린 것들을 데리고 교편자리를 잡아 황해도 구석으로 숨어보기도 했소.

다음해에 아이들 학교 때문에 돌아오기는 했으나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소. 그 뒤로도 애들이 불쌍해서 눈물로 세월을 보내면서 여러번 집을 나가 보았지만 역시 똑 같았지.

취중에 일어난 황당한 일들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겠소. 송장을 칠 뻔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고, 머리는 깨져서 만날 붕대로 싸매고 다니고, 사흘걸이로 이부자리에다 소변을 보았소. 햇빛 쪽을 따라다니면서 이부자리를 말리고 있으면 속 모르는 이웃들은 "댁의 어떤 애기가 날마다 오줌을 쌉니까?"하고 물어봐요. 집에서만 그러면 다행이게요. 남의 집 이부자리도 망쳐놓고는 했지. 집을 얻으러 다닐 때는 술 취한 남편 옮기기 쉽게 문전이 평지인 집을 찾아다니고는 했답니다.
 
막내딸이 아홉 살 되던 해 초하룻날 아침이었어요. "인숙아, 너를 위해서 아버지는 오늘부터 술을 안 먹겠다."하는 거예요. 어리둥절했지요. 그날부터 집안은 화창한 봄날이요, 다른 세계였소.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유는 다른데 있었소. 자식 놈들이 부전자전으로 술이 고래인데 밤마다 술을 마시고와서 나더러 술값을 안 준다고 살림을 때려 부수고, 택시비 달라고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 지르고 하니까, 부자가 이러다가는 붙어 살 동네가 없겠다 싶어서 술을 끊었대요.

   
▲ 수주문학상 수상자 ⓒ부천타임즈
수주가 죽은 지 50년이 지났소. 수주문학상이니 수주문학제니 해서 이렇게 활발하게 수주에 관한 일들이 벌어질 줄 누가 알았겠소. 공원에 시비도 있고 동상도 세워져 있습디다. 수주 묘에서 해마다 백일장도 열리고, 참배객도 늘어납디다.

수주를 일컬어 천재시인, 일제하에서 단 한 줄의 친일문장도 쓰지 않은 시인, 조국 잃은 마음을 달래느라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던 시인, 여러 말들을 합디다. 허나 나는 천재고 뭐고 다 싫었소.

지금 시대라면 어느 여자가 같이 살았겠소. 일 년도 못 버티고 도망가든지 이혼을 하든지 했을 것이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세월을 어떻게 건너왔나 싶네요.  

하지만 어찌 살면서 밉기만 했겠소. 책을 한번 붙잡으면 혼자서 방에 들어가 밥도 먹지 않고 다 읽을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오. 나는 그럴 때의 수주가 든든하니 좋았소. 남의 비위를 맞추거나 아첨은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지. 그런 반면에 공연히 남을 깎아 내리는 법도 없었소. 다정다감한 면도 있었다오. 만취해 오면서도 어린 것의 우유만큼은 잊지 않고 꼭 사들고 왔어요.

또 전처가 죽은 지 20년이 되던 해, 살아있다면 환갑이었답니다. 그래서 가족끼리 절에 가서 그 날을 기념한 일이 있었어요. 그 일을 두고 사람들은 나더러 서운하지 않느냐고 했지만 나는 괜찮았소. 자식을 다섯이나 낳아준 사람인데 그렇게라도 해 주어야지. 내가 죽더라도 잊지 않고 생각해 주겠구나 싶었지. 수주가 '서울시문화상'을 받았을 때는 내조를 잘한 덕이라고 나를 치켜세워줘서 우쭐해지기도 합디다.

좋은 자리에 와서 수주 흉을 실컷 보아버렸소. 소갈머리 없는 아낙네의 한바탕 한풀이라 생각하고 여러분들이 이해해 주구려. 이런 큰 잔치를 해 주는 걸 보니까 고향이 좋기는 좋소. 수주가 선견지명이 있어서 고려 때 부천의 지명인 '수주'를 호로 썼나보오. 이제 나도 저기쯤에서 내 꼴을 지켜보고 있는 수주와 함께 산소에 가서 편히 누우려오. 이렇게 좋은 일 하는 여러분들 복 많이 받을거구만.

시인의 아내가 살아 온 이야기를 아래의 책들을 참고하여 엮어보았습니다. 수주 선생을 폄훼하려는 뜻은 없었습니다만 조금이라도 누가 되었다면 깊이 사죄드리겠습니다. 앞으로도 수주 선생의 찬란한 시혼詩魂은 '햇볕 사립짝에 졸고졸던 고향'부천에서 도도히 흐를 것입니다. 

*참고문헌
-<나무고을 코스모스의 거룩한 분노>, 김광묵 엮음, 수주문학상운영위원회, 2001년
-<수주문학>창간호, 산과들, 2004년
-<주해 명정 40년>, 변영로 지음 민충환 엮음, 산과들, 2008년
-<주해 수주수상록>, 변영로 지음 민충환 엮음, 산과들, 2009년

   
▲ 수주 변영로 일가 묘지

덧붙이는 글/편집자 주

민족시인이자 부천을 빛낸 인물로 지정된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1897년 5월9일~1961년 3월14일) 중앙학교(지금의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전 등에서 교편 생활을 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 주립 산 호세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신문학 초창기에 등장한 신시의 선구자로서, 압축된 시구 속에 서정과 상징을 담은 기교를 보였다. 민족 의식을 시로 표현하고 수필에도 재능이 있었다. 광복 후 성균관대학교·해군사관학교 교수 등을 지냈으며, 대한공론사 이사장으로 영자 일간지를 발간하였다. 1951년 제2회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고, 1955년 제1대 한국 펜클럽 회장에 선출되었다.대표작으로 〈논개〉, 〈사벽송〉 등이 있고, 수필집 <명정 40년> 등이 있다부천에서는 수주 선생의 정신을 기리고 부천시민의 자긍심 함양과 역량 있는 문인 발굴을 위한 수주문학제와 수주문학상을 제정해 매년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 수필가 최미아
최미아 작가는 전 부천수필가협회 회장이며  2000년 '수필과 비평'을 통해 등단했다.

수필집 '잔잔한 시하바다(도서출판 산과들)'는 고향과 일상, 도시에서 떠올리는 고향의 추억, 바램 등 네 가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수록하였다.

첫번째 이야기 '별은 총총'은 고향의 정취를 푸근하고 능청스런 문체로 담아냈으며 두번째 이야기 '시댁이 좋다'에는 작자의 소박한 일상과 그를 통한 작은 깨달음들에 관해 실었다.

 세번째 이야기 '호야등이 있는 풍경'에서는 도시 생활 중에 만나는 고향의 흔적들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네번째 이야기 '당치 않은 꿈'을 통해 앞의 글들을 감싸 안으며, 옛것의 쇠락과 도시의 발빠른 변신을 바라보는 씁쓸한 마음을 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