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옥수수의 이념을 가진 적 있었다 / 김왕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2. 10. 2. 12:04
728x90

옥수수의 이념을 가진 적 있었다


김왕노

 


  1
  그 사막에서 옥수수 싹이 돋아났다고 했다. 옥수수 뿌리는 죽은
자의 몸을 텃밭으로 자랐다고 했다. 슬픈 죽음을 세상에 알리라고
옥수수는 죽은 자의 주머니에서 죽음의 즙으로 자라났던 것이다.
죽은 자의 넋을 옥수수 줄기로 잎으로 밀어올렸던 것이다.


  2
  꽃 시절은 출가 중이니 옥수수나 키우자니까. 옥수수 꽃도 가만히
쳐다보면 볼만 한 것 옥수수 수염은 옹고집의 세월을, 꺾이지 않는
지조를 가르쳐 주는 것, 올 곧게만 자라는 옥수수의 이념을 가지자
니까. 척박한 땅에 뿌리박고 고구려의 무사처럼 잎을 휘두르는 옥
수수의 검법을, 그 나란히 잎맥의 정신을 본받자니까. 굶주린 세월
을 거뜬히 먹여 살리는 그 번식력을 그 생명력을 닮아서 우리도 척
박한 세월 위에 척척 서보자니까.


 3
  너무 가지런하게 빛나는 노란 사랑을 읽은 적 있다. 너무 가지런
해 먹지 못하고 숙희가 내게 가져와 내밀던 옥수수, 그 노란 사랑,
그 노란 식욕, 알알이 까서 서로의 손에 놓아주던 그 노란 알의 사
랑, 노란 사랑의 노란 이념, 그 가지런한 정갈한 사랑, 어디서 이제
는 홀로 익어 갈 노란 사랑, 서걱거리는 바람 속에서 홀로 노랗게 익
어가다가 퇴색할 사랑


  4
  옥수수를 딸 때 옥수수 대에서 우수수사 분리되며 내던 딱 소리가
우주를 울린다는 것을 알았다. 우주의 목탁소리라는 걸 알았다. 빈
식용유 통 하나 들고 몰래 숨어들었던 전방의 옥수수 밭, 들키면 말
뚝 박고 영창 간다지만 졸병에게 삶아주려 숨어들었던 옥수수 밭,
별 초롱초롱해 더 무서웠던 밤, 오지리 고운 분이가 잠든 밤, 조심스
레 옥수수를 돌리자 나던 딱 소리, 옥수수가 옥수수 대를 떠나며 내
던 작별의 소리, 우주 끝까지 번져가 여운마저 다 사라질 때까지 나
는 숨죽였다. 지금도 내 가슴의 가장자리를 물들이고 있는 그 푸른
소리


  5
  딱 옥수수 한그루만 이 주구위에 자라나게 해다오. 딱 한 사람만
지구에 있고 딱 한 송이 꽃만 피고, 딱 한 마리 새만 저녁을 지키고
그러면 어느 별에서 딱 한 사람이 찾아들고 서로의 짝을 먼별로부
터 불러들여 주면 옥수수는 비로소 푸르고 푸르러져 옥수수만으로
연명하고 옥수수로만 노래하는 세월이 오게 해다오. 옥수수의 정부
옥수수의 당국만 있게 해다오. 옥수수의 달콤한 그늘만 세상에 가
득 차게 해다오.

 

 


-계간『예술가』(2011년 겨울호)
-웹진 시인광장 선정『2012 올해의 좋은 시 100選』(아인북스, 2012)
2012-10-02 화요일 오전 11시 29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