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호접몽 / 이병일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2. 10. 2.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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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접몽


이병일

 


  1
  꽃의 여백은 죽은 나비들에 대한 추억으로 채워져 있고 죽은 나비
들은 모두 책이 되었다, 누가 그걸 펼쳐 읽을 것인가 늙은 개의 콧
잔등에 앉은 저 산제비나비의 표정은 알 수가 없다 두려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나비는 천천히 춤을 풀었다 그 안에는 신
비하게도 파랑이 숨어 있다


  2
  향기의 침묵沈默은 언제나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날개는 너무
나 약해 바람을 잡을 수 없고, 꽃의 심지에 붙은 불을 끌 수도 없다
오늘도 부드러운 꽃의 음자리를 배열해주는 나비는 하나의 악기가
되었다 발끝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났다 나비의 감각들은 꽃의 악보
들을 더듬더듬 찾는 것이다 그렇다, 꽃에게도 나비란 악기가 하나
있어 봄가을이 가볍게 튕겨지는 것이다


  3
  그해 여름이 오기 전, 어떤 나비도 꽃의 빛깔을 바꾸지 못했다 꽃
들은 못생긴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렇게 나는 날개를 물끄러미 세워
뒀으니 살아온 날들은 신기하게도 호접몽이 되었다 사람들은 시간
을 빌리러 그곳으로 갈 것이다 그러나 늙은 개는 하늘을 접었다가
폈다 장난을 치는 산제비나비의 춤 따위엔 관심이 없다 나는 낯선
책갈피처럼 부서졌으니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 갈 것이다 나는 장
님처럼 한때 내 날개의 세상에게 찾지 말라고 편지를 썼다 그리고
곧 무너져 내릴 호접몽 속에서 나는 해와 달을 꺾다가 잠든 공명空冥
이 되었다

 

 


-계간『시인시각』(2011년 가을호)
-웹진 시인광장 선정『2012 올해의 좋은 시 100選』(아인북스, 2012)
2012-10-02 화요일 12시 27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