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호모두르(homo-door) / 양은숙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2. 10. 4.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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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두르(homo-door)


양은숙

 


1
나무에서 내려온 자
그리하여 맨 처음 동굴로 들어간 자
누구인가, 신들의 시간으로부터
사람의 시간을 훔쳐낸 자,
맨 처음 문을 만든 자는 누구인가
둥근 동굴 밖으로
붉은 구름 희게 물들며 눈부신 해가 뜨는
거대한 풍경을
웅크린 채 바라보던 경외의 시간
등을 굽히고
두려움의 그늘에서 씨앗과 열매를 줍고
먹다 남긴 동물의 사체를 훔치며
쫓기다 굶주리다 도망치다 고단하게
하루치의 끼니를 잇던 자

 

2
하루를 일생으로 산
태양이 죽고 땅거미와 함께 예고처럼
온갖 신들의 시간이 내려오는
어스름, 달과 나무와 바위에
신령한 혼이 흐르는 두려운 야행
훔친 사람의 시간을 동굴 속 불길로 사르던
호모두르
토막잠을 자면서 두 귀를 세우던 등 뒤
나무로 엮은 헐거운 문이
안과 밖을 갈랐다
대자연은 빛이었고 사람은 어둠이었다
사람과 사람을 가른 문,
맨 처음 그 문을 만든 자는 누구인가

 

3
그들은 배에 자물통을 박아 넣고
열쇠로 쑤시고 버튼으로 누르고 지문을 들이댄다
내게 있는 건 시조새의 눈알 같은 카메라
나의 일차적 목적은 방어다
선택적 방어를 위해
언제든 약속에 맞게 나를 잠근다
그때의 나는 벽이다
아무도 뚫지 못한다
누구도 나를 통과하지 못한다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단절이다
정문에서 현관까지 그들은 도합 세 개의 문을 통과해야
집으로 들어올 수 있다
그들을 보며 엄연했던 나의 전모를 떠올린다
한낱 헝겊이던
한낱 나무였던, 거적이었던, 울타리였던
헐거운 조상을 잊어버린 나는
어쩌면 타락이다, 문의 대한 눔의
기만이다, 진화가 아닌 퇴화다 슬프게도
지금 나는 벽이 되는 중이다

 

4
닫혀서 벽이 된 나는
감감히 서서 조금만 열린 문이 되길 바란다
살그머니 고양이가
강아지와 바람과 온갖 냄새가 드나드는
조금 열린 문
그러면 지문투성이 내 몸에도 무슨 계절이
찾아올 것이다, 종종 그런 생각은 마침내
봄밤의 차분한 습기를
내게 실어다주고 다소 나를 늘어지게 한다
장마의 우울도 조금씩
마시면서 나는 조금씩 상하고 조금씩 더 늘어진다
세월이라 하자, 내가 앓는 이
천천히 낡고 천천히 삐걱거리는 병
병들어도 나의 본분은
일차적 목적에 복무한다, 골백번 나는
방어를 위한 존재다

 

5
크로마뇽인 같은 정문 경비를 젖히고
아파트 현관을 열고
엘리베이터 문을 거쳐 마침내 15층
자기 집 문 안에 들어서는 사내를
네모난 베란다 문이 마주 본다
안방문과 안방창문
싱크대문화장실문냉장고문장식장문
도합 스무 개 넘는 모든 문들이 숨 멎은 채
그를 바라본다
주춤거리는 사피엔스 사피엔스
컴퓨터를 켠다, 화면에 뜨는 MS 윈도우
또 다른 문,
장막처럼 내려오던 신들의 시간을
버튼 하나로 차단한다
차단된 문명에 비로소 안도하는 사내
끊임없이 문을 만드는 자
꿈에도 열쇠 소리가 나는 자
문 밖의 문에서는
문 안의 문이 보이지 않는다

 

 


-웹진『시인광장』(2012년 6월호)

-웹진 시인광장 선정『2012 올해의 좋은 시 100選』(아인북스, 2012)
2012-10-03 목요일 12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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