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계간 『시와 시』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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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깊은 바다를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깊은 바다를 유영하는 한 마리 물고기처럼 살면 안 되는 걸까. 이 단단한 제도의 틈과 틈 사이를 자유롭게 흘러 다니면서? 그러다가 다른 물고기나 산호초와 문득 눈이 마주치면, 생긋 한번 웃어주고는 이내 제 길을 가는 거다.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고, 어디에도 미련 두지 않고! 정이현의 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2006년)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이 소설은 20~30대의 젊은 독자들에게 사랑받은 바 있는데, 그 중 인용된 구절에는 한국 사회의 젊은 계층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인생관이 압축되어 있다. 소설가는 그것을 물고기로, 그것도 떼를 지어 다니는 물고기 군집의 개체로서가 아니라, 유영의 자유를 만끽하는 ‘한 마리 물고기’로 표상해놓았다. 이러한 자아정체감에 기반하면 혼자 식사를 하거나 여행을 떠나는 일은 그리 어색하고 불편한 일이 아니다. 갖가지 애로사항에도 불구하고 1인 가족이 늘어나는 이유 역시 자유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젊은이들의 가치관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현대 사회에서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단독 개체로서의 삶은 부정적인 의미로 이해되어 왔다. 예를 들어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개념은 문명사회가 일으키는 아노미적 폐단의 일부를 표현한다. 하지만 인용된 구절은 ‘군중 속의 고독’을 현대인의 쿨한 자유감으로 업그레이드 시킬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군중 속의 고독’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고독을 상쇄시키는 다른 방법이나 가치관 또한 습득해가고 있다. 일부는 고독을 고통이나 상실과 동의어로 생각하는 대신, 거기에서 자유의 기쁨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용문에도 역시 ‘?’라는 의문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주시하자. 단독으로서의 한 개체가 과연 ‘한 마리 물고기’처럼 살 수 있을까. 살 수 있다고 해도 그 시간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실현 가능성은 아직 미지수이다. 자유를 찾을 수 있는 것은 현대인에게 있어 부자가 천국에 가고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무릇 우리에게서 자유는 멀다. 아니, 빛보다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별들처럼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심지어는 자유로운 유영의 상징처럼 인식되던 물고기의 심상에서도 그 자유로움의 의미가 삭제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거리낄 것 없이 어머니 바다에 안겨 존재의 자유를 즐기는 물고기란 이미 ‘상상된 물고기’이지 실제의 물고기가 아니다. 본래적으로 이미지란 인간의 손을 거쳐 정착된다. 그러나 관념적 조작에만 인간의 손이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실제 대상에 변화를 초래하고 그로 인해 이미지의 토대 역시 변화한다. 우리 눈앞의 물고기가 더 이상 자유롭게 유영하지 못하는데 자유의 대명사로서의 물고기가 어떻게 관습적 의미를 고수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남획되고, 오염되고, 양식되고, 쫓겨난다. 자유의 물고기는 인간에게서 멀어지고, 대신 자유를 잃은 물고기는 인간에게 더 가까워진다. 그리고 이 근접하는 대상을 우리는 동병상련이나 측은지심의 심정으로 바라본다. 사실, 그것들은 더 멀어졌어야 옳다. 밤하늘을 버린 별들처럼, 우리를 버리고 떠났어야 한다. 하지만 자유의 상징은 어느새 자유를 잃고 찾아온 손님이 되었고, 시인들의 마음에 다음과 같은 작품들로 새겨지기도 한다. 2. 자유로운 물고기는 없다 “광어 한 마리 만원”이라는 현수막을 보면 입맛이 다셔진다. 그런데 정작 수족관 앞에 서면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건강해 뵈지 않는 이 물고기들은 그다지 쫄깃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아직 눈을 뜨고 있는 그들이 나를 원망하게 될 것 같은 꺼림칙함. 이것이 일상적인 수준에서의 생각이다. 일상적 수준의 사유는 깨달음이나 감동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들은 사용되고, 곧 버려져야 한다. 반대로 실용적인 목적에 합당하지 않고, 따라서 쉽게 잊혀지지 않는 생각들이 있다. ‘생각’이라고 말했지만 이것은 머리에서 떠오른다기보다는 감각에서, 마음에서, 그리고 이 둘을 포함한 ‘온 몸’에서 피어오른다. 그것을 사용할 실용적인 용법은 없다. 하지만 비실용적인 용법은 자기 존재의 이해나 반성과 같이 영혼의 깊은 상태를 진단하는 무형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나의 골목 귀퉁이에는 수족관이 있어서 물 위에 물을 쌓는
물로 물을 씻는 수족관이 있어서 나는 매번 그곳서 큰숨을 한차례 쉰다 오늘은 서너 마리가 유영을 하고 있다 물속에 가라앉는 물고기가 하늘을 알까만 한 마리에게는 소천(召天)이 있을 것 같다 비늘이 너덜너덜하지만 홑청을 마련해줄 수 없고 겨우겨우 아가미가 움직이나 폐를 빌려줄 수 없다 두 눈이 헐겁게 떨어져나가고 있다 수족관으로부터 너절하고 수군거리고 베개에 머리를 괴러 가는 쓰러져 누운 나의 골목이 하나 있다 - 문태준, 「수족관으로부터」, 『창작과 비평』, 2011, 봄. 문태준은 1990년대 후반 서정시의 부각과 함께 했던 시인이다. 대중에게는 「가재미」나 「맨발」이라는 시가 알려져 있지만 그의 작품에는 삶에 대한 진중한 태도, 깊이 있는 사유, 미학적 성찰을 자랑하는 수작이 적지 않다. 지금까지 그의 작품 세계는 ‘극빈의 시학’(이광호)이라든가 ‘사물들 사이의 유현(幽玄)을 소묘하는 미묘하게 다른 서정’(이장욱), ‘한국적인 근대의 내면이자 무의식’(김수이) 등의 평가를 받은 바 있는데, 호평의 옹호 없이도 그의 시는 많은 사람에게 ‘좋다’는 느낌을 선사할 것이다. 「수족관으로부터」는 시인의 최근작이다. 이 작품을 읽고 ‘좋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문학적으로 설득을 당했다는 말이다. 문학은 논리가 아닌, 아름다움이나 정서 등을 무기로 설득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 시에서는 너절한 인생이자 쓰러져 누운 초라한 삶이 어떻게 그 너절함과 초라함을 견디는지, ‘견딤의 시학’을 보여주면서 독자를 설득한다. 시인의 시선 속에서 우리의 삶은 미화되지 않은 초라함을 드러내고, 독자는 시인과 함께 고통의 현장을 직시하게 된다. 고통스럽되 회피하지 않는, 슬프되 증오하지 않는 삶을 우리는 시인에게서 배우는 셈인데, 시인은 정작 그 삶을 수족관의 물고기로부터 배우고 있다. 이 작품에서 시인은 골목 어귀에 있는 작은 수족관을 찾아간다. 거기에는 횟감으로 팔릴 물고기들이 갇혀 있 다. 수족관에서 본 ‘서너 마리의 유영’이란, 정이현의 소설에서 엿보았던 ‘물고기의 유영’과 대조적이다. 태어날 때부터 앞으로 헤엄쳐나갈 본능을 가진 물고기가 작은 수족관 안에서 유영 아닌 유영을 하고 있는 모습은 사뭇 비극적이다. 그런데 시인은 생태학적 관점에서 물고기들에 대한 잔혹한 처사를 비판하려고 이 작품을 쓴 것이 아니다. 이 작품에서는 외부에 대한 비판과 성토가 아닌, 자기 성찰이 문제된다. 우리가 거울을 통해서만 자기 얼굴을 바라볼 수 있는 것처럼, 시인 역시 자신의 거울을 찾아 수족관을 방문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자기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보기 힘든 삶의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시인은 또 다른 자아인 수족관 물고기를 바라본다. 즉 갇힌 채 죽어가고 있는 물고기들은 간 삶을 압축해서 재연하는 자화상인 셈이다. 또 다른 우리들은 분명 죽어가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고 있다. 이들이 침묵 속에 삶을 지속, 아니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우리라고 다를까. 하지만 신기한 것은 이 시에서 시인을 따라 답답한 현실을 직시하는 과정이 너절한 삶에 대한 증오나 포기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인은 힘주어 강조하지도, 우리를 독려하지도 않는다. 그저 삶의 비참한 과정을 상징적으로 비추었을 뿐인데, 우리는 작품을 통해 삶에 대해 정직하고 무게 있는 자세를 엿보게 된다. 시인은 비참을 보고 돌아섰다. 그러나 이 시에는 수족관만 있는 것이 아니고, 수족관을 견디는 골목이 있으며 그 골목을 견디는 발걸음이 있다. 굳이 비참의 현장으로 찾아가고, 굳이 그 앞에 멈추어 있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그 발걸음의 무게를 우리는 존중한다. 그리고 끝을 알면서도 끝까지 견디는 것이 인생의 최대치이자 가장 위대한 사소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3. 상한 물고기처럼 사랑하기 문태준 시인과 같은 소재를, 다르게 해석하는 작품이 있다. 아래의 작품은 수족관 물고기를 사랑하는 방식과 연결하여 ‘물고기=자유’의 자동연상에서 벗어나 ‘물고기=사랑’으로 옮겨놓는다. 활어회집 수족관에 빼곡한 물고기들 죽을 차례만 기다린다 뺨들을 비비며 비켜나간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저 견딤 죽음과 견딤의 값으로 방부제가 날까 항생제가 날까 뜰채가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나의 공복은 또 어떤 살해를 꿈꾸는지 내 몸 곳곳에서 비늘로 돋는 허기 나는 누구의 뺨을 만져봐야 하는가 - 유현서, 「견딤의 방식」, 『유심』, 2011. 7/8. 유현서 시인의 작품을 보면 뺨을 부비는 물고기들의 사랑방식이 등장한다. 예전에는 살결의 마찰을 통해 사랑의 다정스러움을 행하는 것은 많은 경우 비둘기의 몫이었다. 비둘기를 포함하여, 조류들 간에 부리를 부비고 날개를 포개고 서로 기대어 앉는 정다움은 쉽게 사용되는 비유였다. 그러나 지금은 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여기에는 비둘기가 도심의 천덕꾸러기가 되고 비대하거나 더러워진 사정도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물론 시적인 대상은 전적으로 물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관념적이고 상상적인 부분이 크다. 시인은 보지 않아도 말할 수 있으며, 경험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던 상상의 동물이 눈앞에 출현한다고 하면, 말과 경험의 층위가 변화를 겪을 것은 분명하다. 물고기에 대한 시인들의 심상도 마찬가지이다. 최근까지 그것은 멀리 떨어져 분명 존재하지만 인간이 쉽게 찾아보거나 만날 수 없는 대상이어서 자유와 자연의 상징을 잃지 않았다. 예를 들어 해양 속의 생물은 시에 등장할 때 나희덕의 시 「마른 물고기처럼」에서 마른 황태로 등장하거나, 문정희의 시 「새우와의 만남」에서처럼 요리 일부로 등장하는 식으로 한번 형태 변환을 겪고 나타나곤 했다. 그런데 소형 활어횟집의 활성화를 반영하듯, 멀리 있던 바다 생물이 사람들의 눈앞에 살아 있되 살아 있지 않은 어중간한 상태로 제 모습을 등장시킨다. 그리고 시인들은 이들의 변화된 상태 앞에서 변화된 시적 심상을 만들고 있다. 소중한 것(터전)을 상실한 자,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행을 견디는 순정한 자의 이미지는 그 변화된 심상 중의 하나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유현서 시인은 곧 죽을 저들의 다정한 뺨과, 아직 죽지 않은 자신의 뺨 없음을 대비시킨다. 그리고 이 사랑하며 죽기, 사랑 없이 살기의 대조를 통해 시인은 잔인한 인간의 취향을 되돌아본다. 4. 사랑은 변하고 그들도 변한다 어둠 속에서 너는 잠시만 함께 있자 했다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네 몸이 손에 닿는 순간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힘겹게 파닥거리고 있었다, 나는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몸을 비벼야 하는 것처럼 너를 적시기 위해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비늘이 어둠 속에서 잠시 빛났다 그러나 내 두려움을 네가 알았을 리 없다 밖이 조금씩 밝아오는 것이, 빛이 물처럼 흘러들어 어둠을 적셔버리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시든 비늘 위에. 아주 오랜 뒤에 나는 낡은 밥상 위에 놓여진 마른 황어들을 보았다 황어를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지만 나는 너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 황어는 겨울밤 남대천 상류의 얼음 위에 앉아 잡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지느러미는 꺾이고 그 빛나던 눈도 비늘도 다 시들어버렸다. 낡은 밥상 위에서 겨울 햇살을 받고 있는 마른 황어들은 말이 없다. - 나희덕, 「마른 물고기처럼」 사람들은 영화 『봄날은 간다』(2001년)의 명대사로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를 기억한다. 사랑이 변한다는 건 사랑해 본 사람은 다 아는 진실이다. 사실 변하기 때문에 사랑의 가치가 지금껏 유지되어 온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반대로, 변하기 때문에 ‘불변의 사랑’에 대한 언급과 꿈꾸기가 먹먹한 울림을 선사하기도 한다. 인용한 나희덕의 시 「마른 물고기처럼」은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이자 사랑에 관한 작품이기도 하다. 시인은 『장자』의 「대종사(大宗師)」의 구절, 다 마른 샘 바닥에서 물고기들이 서로에게 침을 뱉어준다는 부분에서 착안해서 이 시를 썼는데, 이 시에는 가난한 사랑 노래와 존재의 변이를 통해서도 잊혀지지 않은 사랑 노래가 결합되어 있어 사람의 사랑을 진실되게 그려내고 있다. 우리가 고작 물고기였던 시절에도 우리는 사랑을 했고, 내가 사람이 되고 네가 황태가 되어 돌아온 시점에서도 서로를 알아봤다는 것은 인간의 사랑을 우주적인 차원으로 확장시키면서 사람과 사랑 모두를 구원한다. 사랑에 대한 낭만적인 믿음을 고전적인 풍취로 엮어낸 이 작품은 마치 서정주의 작품 「인연설화조」에서 보였던 존재 간 무한 인연을 연상시킨다. 「인연설화조」는 모란꽃과 처녀의 인연이 삼생(三生), 사생(四生)을 돌아 현생에서도 이어진다는 신화적이고 마술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가 이 작품의 작품성을 높이 산다면, 그것은 물고기에 대한 전고(典古)에서 시작한 첫 부분과 마른 황태가 등장하는 뒷부분이 서로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전달하는 감수성은 이런 배치와 표현에 의해서 힘을 받고 있다. 시인은 마른 황태가 지닌 단단함을 통해 사랑의 굳건함을 증명하면서 서로 침을 뱉었던 물고기의 가난한 사랑을 귀결짓는다. 살아 있는 물고기와, 죽은 물고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은 물고기의 사정 이 세 가지 사이에 유정(有情)한 감동이 전달되면서 사랑의 이야기는 한 순간의 포착이 아니라 스토리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아래의 작품은 정반대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희덕의 작품이 여러 겹의 삶을 돌아 단단해지는 사랑을 신뢰한다면, 이 작품에서는 ‘상한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리는 사랑의 변질을 읊는다. 이별하는 연인들을 말을 버리다가 말에게 버림받는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눈의 쾌락을 잊어버렸기에 현실 앞에서 과거를 조작한다 거울이 평평한 것은 현실만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영혼은 제 감정의 단어들만 알 뿐이다 물고기는 어떻게 사랑을 나눌까? 수족관 앞에 앉아 온종일 들여다보지만, 서로의 나체가 상한 고깃덩어리가 될 때까지 그들은 눈감을 생각을 않는다 눈을 감는 순간 과거는 군내를 풍기며 존재하지 않는 페이지 속으로 육박해 들어온다 개새끼 종로삼가 한복판에서 싸우고 있는 술 취한 연인을 바라보며 담배를 문다 누가 누구를 먹고 누가 누구에게 먹히었던가? 말이 사라지면 나도 너도 그저 고기로 태어난 고기일 뿐이다 사람에게 새끼를 잃은 코끼리는 사람을 잡아먹었고, 코끼리에게 새끼 잃은 인간들은 그 코끼리를 죽였다 코끼리의 뱃속에서 열일곱 구의 시신이 나왔다 그 내부 속에서 너덜너덜해진 알몸덩어리들 의미가 멈추면 광기가 시작된다 사랑을 나누던 모습 또한 그러했다 사람은 어떻게 사랑을 나누었을까?
- 김안, 「사랑의 역사」, 『시산맥』 2011. 여름. 나희덕의 작품에서 마른 황태라는 소재는 죽음을 초월하는 사랑의 절대성을 보여주는 반면, 이 작품에서 사랑은 수족관 속의 물고기들을 통해 유한하고 변질되는 사랑으로 표현된다. 똑같이 인간 안에서 발화하는 사랑이 이렇게 달리 이해되고, 같은 바다에서 출생한 물고기가 이렇게 다른 사랑에 바쳐진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이 시에서 시인은 수족관 안에 갇혀 있는 날것 그대로의 물고기를 보고 그들의 사랑방식을 살핀다. 서로 죽을 때까지 눈감을 생각을 하지 않고 지켜보는 것은 그들의 방식이다. 그렇지만 물고기들은 결국 “상한 고깃덩어리”가 되고 만다. 물고기 사이에 지켜보는 일은 인간으로 치면 서로 말을 나누는 것,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말과 의미가 사라지면 결국 인간도 “고기로 태어난 고기일 뿐”이다. 시인은 이 고깃덩어리, 알몸덩어리 사이에 광기처럼 등장하는 것이 사랑이 아닌지 사랑에 대해 회의한다. 사랑의 방식을 살핀 끝에 사랑 자체에 대한 의심을 품는 것이 이 시인의 사랑관인 셈이다. 그 암울한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시인은 고깃덩어리 직전의 살아있는 존재, 물고기를 소재로 취한다. 이렇게 수족관에 대한 시편들이 이전과는 달리 친숙하게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실제적인 우리 삶의 일상과 관련되어 있다. 지금 수족관의 물고기는 상상된 물고기의 기존 이미지를 지워가면서, 우리 인간에게 너 역시 나와 같은 상황이라는 경고 내지 사람의 ‘고깃덩어리’성(性)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런 변화를 보면 모든 것에 양면의 의미가 있음을 다시금 생각게 된다. 물론 물고기는 새로 얻은 이 시적 심상이 전혀 달갑지 않을 것이다.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가 이제 사람들의 마음에만 사는 것처럼, 자유로워 행복한 물고기는 곧 동화책에만 남게 될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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