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례의 「도둑들」평설 / 홍일표
도둑들
최정례
양말을 빨면 꼭 한 짝은 사라진다
우리가 집이라 부르는 곳에서
장롱 서랍도, 침대 밑도 아닌 그 너머
우리가 모르는 곳으로
양말 짝도 도둑처럼 날마다 진화하는가
문틀이 어긋나는 집을 떠나
허방의 나라를 발명하려고
꿈속의 한구석을 오려내고
몸을 숨기는 것들
눈뜬 구슬처럼 사라지는 것들
화장터 굴뚝 끝에서 연기로 흩어진 이가
이것이 나다, 나야라고
말해줄 리는 없다
꿈의 계곡 자갈돌 옆에
반짝이는 구슬이 있었다
주우면 그 구슬 아래 그 아래
다 줍지 못했는데 반짝이며 굴러갔다
무엇 때문인지 눈이 내렸고
무엇 때문인지 그가 왔다 갔다
운동화 끈 하나 제대로 못 매니?
신발 끈을 묶어주던 손
아득한 계곡 속에 낯익은 손이
사라진 구슬들을 굴리고 있었다
생시처럼 왔다 갔다
한밤중에 깨어나
생각해보니 그렇다
눈인지 흰 꽃잎인지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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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힘
도둑이 다녀갔다. 그런데 도둑은 주민증번호가 없는 피안의 존재이다. 화자의 마음을 훔쳐간 도둑은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거나 지인일 터. 떠나고 사라지고 멀어지는 것이 이승의 인연법이지만 소멸 후에는 큰 그리움으로 다가와 한밤중에 잠을 깨우고 애틋했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이 시는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상의 활달한 발걸음으로 고인이 된 사람을 불러내어 현실의 질서에 편입시킨다. 일상의 현장에서 죽은 이를 다시 만나고, 생전의 그의 모습을 환기하면서 하나의 형상을 구체화시키지만 영속하지 못하는 존재는 달아난 잠과 함께 곧 피안의 저편으로 사라진다. 즉 현실-꿈-현실로 시적 공간이 이동한다. ‘생시처럼 왔다’ 간 고인은 더 이상 화자와 함께 할 수없는 환상이다.
최정례의 시에는 꿈 속의 장면들이 자주 등장한다. 꿈의 공간은 간절한 염원이 구현되거나 고인이 되어 만날 수 없는 연인을 만나기도 하는 등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들이 자유롭게 실현되는 공간이다. 꿈은 개연성과 무관한 즉 환상이다. 한때 환상은 사실주의자들로부터 무의미한 것으로 매도되어 폄하되기도 했다. 그러나 환상은 살과 뼈가 있고, 피가 흐르는 엄연한 현실이다. 21세기는 환상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학에서도 시의 영토를 확장한 미래파의 젊은 시들이 이미 그 사실을 증명했고, 모든 문화의 정점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환상의 패러다임이다.
이 시에서도 화자는 비극적 이별을 꿈을 매개로 견디고자 한다. 결핍의 자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꿈과 결합할 때만 가능하다. 꿈은 현실의 숨통을 여는 수단이다. 그러나 화자는 지향해야 할 곳이 세계 너머가 아님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꿈꾸면서 현실을 견디고 깨어있는 것, 그곳이 최정례 시의 착지점이다.
홍일표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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