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 한 장 붙여서
천양희
꽃 필 때 널 보내고도 나는 살아남아
창 모서리에 든 봄볕을 따다가 우표 한 장
붙였다 길을 가다가 우체통이 보이면
마음을 부치고 돌아서려고
내가 나인 것이 너무 무거워서 어제는
몇 정거장을 지나쳤다 내 침묵이 움직이지
않는 네 슬픔 같아 떨어진 후박잎을
우산처럼 쓰고 빗속을 지나간다 저
빗소리로 세상은 여위어가고 미움도 늙어
허리가 굽었다.
꽃 질 때 널 잃고도 나는 살아남아
은사시나무 잎사귀처럼 가늘게 떨면서
쓸쓸함이 다른 쓸쓸함을 알아 볼 때까지
험한 내 저녁이 백년처럼 길었다 오늘은
누가 내 속에서 찌륵찌륵 울고 있다.
마음이 궁벽해서 새벽을 불렀으나 새벽이
새, 벽이 될 때도없지 않았다 그럴 때
사랑은 만인의 눈을 뜨게 한 한사람의
눈먼 자를 생각한다 누가 다른 사람
나만큼 사랑한 적 있나 누가 한 사람을
나 보다 더 사랑한 적이 있나 말해봐라
우표 한 장 붙여서 부친 적 있나
-천양희|장석남 외 지음『시, 사랑에 빠지다』(현대문학. 2009)
|시작노트|
사랑할 때 사랑하라고 말들 하지만 나에게 사랑은 잔인한 경험이
었다. 모든 작품이 반성문이거나 자서전이듯이, 사랑 또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
1942년 부산 출생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산이 우리에게 묻는다면』『사람 그리운
도시』『하루치의 희망』『마음의 수수밭』『오래된 골목』『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너
무 많은 입』등.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박두진문학상> <공초문학상> 등 수상.
'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봉 / 김종철(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6) (0) | 2013.01.10 |
---|---|
피에타 / 이건청 (0) | 2013.01.10 |
내어주기 / 김승희 (0) | 2013.01.09 |
나는 핸드크림을 바르지 않는다 / 맹문재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5) (0) | 2013.01.09 |
새와 나무 / 오규원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4) (0) | 2013.0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