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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주 - 가족사진 / 좌판에 누워 / 눈뜬 장님 / 겨울 석양 매음녀 1 등...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1. 24.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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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주 (1953~1992)

 

 

가족 사진

 

 

바람난 에미가 도망치고 애비가 땅을 치고 울고

 

애비가 섰다판에서 날을 새고

그 애비의 아이가

애비를 찾아 섰다판 방문을 두드리고

 

본드 마신 누이가 찢어진 속옷을 뒤집어 입고

지하상가 쓰레기장 옆에서

면도날로 팔목을 긋고

 

세 살 난 막내가 절룩, 절룩 자라가고

에미 애비와 누이의 일들을 거침없이 이해하고

 

오늘, 밤마다 도시가 하나씩 함몰되고, 나는

등불에서

등심지를 싹둑, 싹둑 잘라내고

 

 

 

좌판에 누워

 

 

, 간 절은 자반 고등어다

홍제동 시장터에서 도매값 팔백원이다

비늘은 죄다 떨어져 나갔다

살은 질기다

 

칠백원, 어때요?

아줌마 너무하시네, 칠백오십원!

 

창시 빠져나간 뱃가죽 좌판에 늘어붙어

식탁으로 가는

, 기다리는

 

해가 또 진다

 

 

 

눈뜬 장님

 

 

백내장 눈뜬 장님

바람 몰리는 소리에도 덜커덩

부들부들 온몸을 떤다.

낡은 외투 감추어진 마른 몸뚱어리

멀건 회색빛 뜬 눈으로

지팡이를 찾아 더듬더듬 방구석으로 가서

덜덜덜덜 몸을 떤다

그의 작은 창, 북풍에 흔들거리길 몇 해

날밤 숱하게 이불 뒤집어쓰고

태양은 오늘도

어디서 젖은 땅 말리고 돌아갔는지

누가 재판의 형을 언도받고

누가 이름없이 또 죽어가고

어디서 누가 신나를 몸에 붓고 깃발을 드는지

허연 창 경련하듯 껌벅거릴 뿐

알고 싶지 않다

굳은 빵덩어리 머리맡으로 자꾸, 자꾸 꿈에서도

끌어당기는 백내장 추한 눈뜬 장님

이제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다

헐겁고 낡은 외투에 몸뚱어리 숨겨놓고

세상일 보고 싶지 않아

그 어느날,

스스로 자신의 눈 검은 자위를 지워버린

 

 

 

겨울 석양

 

 

서역, 그 뒤에도

사람이 살고 있습니까?

 

다시 시작해 보자.

더러운

추억의 힘이여.

 

 

 

매음녀 1 / 이연주

 

 

팔을 저어 허공을 후벼판다.

온몸으로 벽을 쳐댄다.

퉁, 퉁 , 반응하는 모질은 소리

사방 벽 철근 뒤에 숨어

날짐승이 낄낄거리며 웃는다.

그녀의 허벅지 밑으로 벌건 눈물이 고인다.

한번의 잠자리 끝에

이렇게 살 바엔, 너는 왜 사느냐고 물었던

사내도 있었다.

이렇게 살 바엔 ― 

왜 살아야 하는지 그녀도 모른다.

쥐새끼들이 천장을 갉아댄다.

바퀴벌레와 옴벌레들이 옷가지들 속에서

자유롭게 죽어가거나 알을 깐다.

흐트러진 이부자리를 들추고 그녀는 매일 아침

자신의 시신을 내다버린다. 

무서울 것이 없어져버린 세상

철근 뒤어 숨어사는 날짐승이

그 시신을 먹는다.

정신병자가 되어 감금되는 일이 구원이라면

시궁창을 저벅거리는 다 떨어진 누더기의 삶은……

아으, 모질은 바람.

 

  

매음녀 3

소금에 절었고 간장에 절었다
숏타임 오천원,
오늘밤에도 가랑이를 열댓번 벌렸다
입에 발린 ××, ×××
죽어 널브러진 영자년 푸르딩딩한 옆구리에도 발길질이다
그렇다, 구제 불능이다
죽여도 목숨값 없는 화냥년이다
멀쩡 몸뚱아리로 뭐 할 게 없어서
그짓이냐고?
어이쿠, 이 아저씨 정말 죽여주시네

 

 

매음녀 4
 


함박눈 내린다

소요산 기슭 하얀 벽돌 집으로

그녀는 관공서 지프에 실려서 간다

 

달아오른 한 대의 석유 난로를 지나

진찰대 옆에서 익숙하게 아랫도리를 벗는다

양다리가 벌려지고

고름 섞인 누런 체액이 면봉에 둘둘 감겨

유리관 속에 담아진다

꽝꽝 얼어붙은 창 바깥에서

흠뻑 눈을 뒤집어쓴 나무 잔가지들이 키들키들

그녀를 웃는다

 

반쯤 부서진 문짝을 박살내고 아버지가 집을 나가던 날

그날도 함박눈 내렸다

 

검진실, 이층 계단을 오르며

그녀의 마르고 주린 손가락들은 호주머니 속에서

부지런히 무엇인가를 찾아 고물거린다

한때는 검은 머리칼 찰지던 그녀

 

몇 번의 마른기침 뒤 뱉어내는

된가래에 추억들이 엉켜 붙는다

지독한 삶의 냄새로부터

쉬고 싶다

 

원하는 방향으로 삶이 흘러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함박눈 내린다

 


매음녀 6

 

 

어머니, 날 낳으시고 젖이 없어 울으셨다.
어머니 숨 거두시며
마음 착한 남자, 등짝 맞대 살으라 이르셨다
나는 부둣가에서
선술집 문짝에 내걸린 초라한 등불 곁에서
매발톱 손톱을 키워 도회지로 흘러왔다
눈 붙이면 꿈속에서 어머니
이 버러지 같은 년아,
아침까지 흑흑 느껴 우신다.
내 심장 차가운 핏톨, 썩은 물 흐르는 소리,
나는 살 속 깊은 데서 손톱을 꺼내
무덤을 더 깊이 판다
하나의 몫을 치르기 위해 삶이 있다면
맨몸으로 던지는 돌 앞에 서서 사는
이 몫의 삶은......
희미한 전등불 꺼질 듯 끄물거린다

 

 

매음녀 7
 

 

  이른 새벽이었네. 죽은 애기를 끌어안고 에미는 종종걸음으

로 어둑한 비탈길 내려왔네. 청소차가 방금 지나간 듯 마른 바

람 한 점 휭하니 거리를 쓸고 있었네. 건널목을 건넌 에미는 외

투자락 잡아당겨 가슴팍 핏덩이를 감추며...... 지하도 계단 앞

에서 주변을 훔쳐 둘러보더니 허둥 허둥 또 걸었네. 지친 에미

곁을 느릿느릿 승용차 한 대가 지나가고 행인들 자꾸만 눈에 밟

혔네. 벌써 날이 밝았어, 벌써 날이 밝았어, 한숨 섞어 중얼거리

던 에미는 신문지에 둘둘 말아 싼 애비 모르는 죽은 것을 쓰레

기통에 쿡, 쳐박았네. 아아, 나이론 살에 불어 타는 냄새

 

 

흰 백합꽃 / 이연주

 

 

푸줏간 주인의 손아귀에 넘어가
살 다루는 숙련가에게
주검이 처분되고 있다: 흰 백합꽃


뼈는 토막쳐져 내장은 발발이 끄집혀 끌려나와
담즙을 분비하던 흔적 역력한
입맛 당기는 간,
꽃술은 모태로 돌아간다
긁어낸 태내 아이처럼 속수무책의
무자비한 주검: 순결이 절단난 백합 한 송이


입술이 덜덜 떨리는 밤이 아니냐?
어김없이 왕왕 짖어대는 흰 개들의 유령,
백합밭이다
피 묻은 쇠 꼬챙이 손가락들은 에잇, 에잇!


살아남은 자들이 수천 번씩 다짐하는
생존법칙은
순결을 지키는 모든 눈의 정수리를 찍어
시간을 훔쳐내라
푸줏간 귀퉁이에 음산하게 버티고 선
도끼자루에 끼어진 굶주린 식욕의 낮과 밤


흰 백합꽃 - 낙태 전문의의 오른손에서
심란하게 가위질당한다
늙은 독재자의 동첩으로
덤핑 약초로 팔려나가게


세상 잘 모르는 꽃, 두 번씩이나 죽어서도
주검엔 프리미엄이 없어
여리디여린 꽃 이파리.

 

 

 

적과의 이별 15. / 이연주

 


당신 몸이 내 속으로 들어올 때
아마
당신은 내 먹먹한 심장을, 나는
쇠처럼 차가워진 당신 간을
후벼파내고 있는 것이네.


두개골은 깨어지고
가슴은 온통 갈라져
당신 몸이 내 속으로 나를 느낄 때
포로가 되어 끌려나오는, 내,
당신 속의 적들,


기어코 사랑은
무덤 파는 인부가 되는 것이네.
식초즙 같은 체액으로
간이며 심장이며
깨진 두개골들 이마를 적셔


잘가라,
내 옛사랑
 

 

 

안개 통과 / 이연주
 


생이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이제 때가 되었다
아직도 허리께서 뜨뜻한
불을 지핀 흔적의 욕망,
사랑이라는 안개의 냄새로
한 시야 저 밖이 움트고 있다고 느꼈으리라
나는 간다
폐가에서는 다시 탄생을 알리는 거미 군단들의
바쁜 행보,
분노라는 어미의 고독한 터널의 음부에서
다시 태어나는 나는
지금은 갈 곳이 두려운 짐승이다
박약한 등뼈를 짐보따리에 우그려 넣다 생각하면
한 시야 저 밖은 아무래도
비로소 늙어 아름다운 날들
나는 간다, 종은 울린다
콧등이 이렇게도 싸아해 두렵기 한이 없는
해질녘 안개의 냄새.
 


 

몰락에의 사랑 / 이연주

 

 

네 몰락이 내 가슴을 흔든다
지옥의 변방에서 하나의 경계선을 그으며
두려움에 떨면서
내 던져진 정체불명의 존재인 나


<나는 아니야> 혼자말로 외치면서
어떻게 해야하나
삶의 빠르기, 높낮이에 관해서
어떻게 해야하나
뒤헝클어진 일그러진 잠의 꿈인 내 심장


몰락이여, 내 가슴을 흔들어라
천왕성에서 내가 기억할 너,
명왕성에서 내가 낳을 너, 사랑하는
너를 상실해 버린, 너


어떻게 해야하나
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
 

 


길 / 이연주
 


가보라 하더구만, 끊어진 길 어귀에서
그래,
내 갔지.
어허, 어둡고
천지사방 막혀
갈퀴진 기르 벌건 살 뻐드러진 험한
내 갔던 길.


그래, 내
떠 갔지.


어디 골대를 겨냥해서 잘 차 넣은
공처럼
적중......
적중의


길이 있었던가? 절벽길
또 가야 한다면
삶의, 어디
사람이 별처럼 모여 반짝이는
마을 앞에 서게 될지, 글쎄
아니라 해도.....
 
 


익명의 사랑 - 위험한 시절의 진료실 1 / 이연주

 


정말 꽃이 되고 싶어, 또는 구름
아홉 배는 내가 더 당신을 사랑할 걸 - 그런 꽃,
새털 옷을 입고
당신 고향 가는 길 앞질러 따라가는
그런 구름.


석간신문이 배달됐지만 의미가 없네.
죽은 고양이도 쥐떼들의 혼령도
이제 더는 문간 근처를 얼쩡거릴 수가 없어.
꽃의 사랑, 혹은 구름.


정부 쪽에선 비밀에 부치겠지?
군중심리란 게
사랑에 오염된다면 전략은 힘들어지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공기는 느끼지.
바람은 느끼고말고.


내가 당신, 하며
꽃가루를 공중에 뿌려주면 공기들은 명렁해질 거네.


새털 옷은 하늘을 얼마나 기쁘게 할까,
사랑인데.

 

 
성자의 권리.1

 

 

나는 수술용 가운을 입었다

나는 메스대에 날을 끼웠다

바람이 영안실 서쪽 벽을 치고 갔다

 

나는 의무를 임명받았다

나는 톱을 들었다

아카시아 향내가

5월이었다 톱날 끝을 지나갔다

그는 왜 늪지로 돌아왔을까

 

여기 돌아와서 곱게 매장되는 일은 없다

사람이 사자에 먹힐 때 기립박수를 보냈던

사람들이 원한다

나는 메스를 든 손에 힘을 모았다

그자의 두피를 벗기고 뇌막을 열었다

사람들이 흥분했다

 

톱날 앞에

골수를 다 내어놓은 그는

죽은 무저항의 시민 김기석인지도 모른다

아카시아 향내가 벌려진 골 속으로

검은 피에 박혔다

 

바람이 다시 와서 서쪽 벽을 치고 간다

시체 안치실로 자꾸만 날아 들어오는

생각이 많은 무성한 흰 꽃잎들

 

 

 

최후 사랑법

 

그가 나를 실망시킨다 나는 실망한다.

또 다른 그가 나를 모욕한다 나는 모욕당한다.

그와 또 다른 그를 나는 눈 속에 집어넣는다.

 

전조등 불빛을 올린 자동차 한 대가 내 눈동자

맨홀 속을 들먹거리다 간다.

그리곤 정적이 왔다, 그리곤

내가 아마 돌멩이를 걷어찼다.

 

돌멩이를 사랑하는 일은 쉽다.

걷어차도 배반 없는, 그러나

애정 없는 섹스.

 

원망에 찬 그와 또 다른 그가 내 눈 속

눈은 심장이니 내 핏덩이를 할퀸다.

 

어둡고 깊고 슬프다.

누군가의 잠꼬대와도 같은

최후 사랑법.

 

 

봄날은 간다

 

토요일 오후 봄날

어른 셋에 여자아이 하나가 거실에 있다

아이는 몇 해를 숨어 있었는지 모를

박제가 돼버린 이상한 나무열매를 들고 있다

솜털에 박힌 마른 씨앗을 하나씩 뜯어내더니

- 아줌마, 땅에 심으면 나요?

 

아이가 베란다 돌밭으로 간다

잠이나 잤으면 싶은 봄 날

- 꼭 꼭 눌러줄 돌을 찾아봐라

싹이 되려면 큰 바람에도 끄덕없는

무거운 돌의 힘이 필요하니까

 

거실의 노란빛 조명등이 웃는다

어른 셋이서 따라 웃는다

토요일 오후,

나른하기 짝이 없는 봄 날.

 

 

비극적 삼각관계

 


암닭 같은 어머니 모로 누워 계신다.

짧은 벼슬을 내려놓고

쭈글쭈글해진 배를 땅바닥에 철퍼덕

모가지를 조여대는 출산에 쓰이는 천조각

 

막 낳은 단조로운 흰 달걀 하나가

아직 뜨끈뜨끈한 김을 내며

「아버지, 저를 죽여주세요」

긴장형 조발성 치매증을 앓고 있다.

 

긴 장화를 신고 난자를 멸시하셨지

휘청거리는 해골을 덜렁덜렁

상스럽게 쓰던

아버지, 아버님, 오, 무자비한......

 

어머니 짧은 벼슬을 푸르르 떨며

어쩌다가 씨앗이 우리를 경멸하게 되었는가.

흘러가던 구름 몇점이

똥을 찍- 갈기고 간다.

 
 

 
유배지의 겨울


 
방문객은 이미 끊어진 지 오래

문들은 결코 열리지 않는다

삶을 꿈 꾸어 오는 동안 내 입김 서린

저 책장의 쓸쓸한 낱 글자들

이제 그것은 단단해져버린 돌고드름의 몸으로

엉겨 마른 내 종양의 세포질을 향해

침묵의 종지부 속으로 돌아오고 있다

한때는 버팀목이 되었던 뼈마디들 앞에

나는 허름한 문짝처럼 덜컹거린다

소금 냄새로 절어버린

나를 감싸 덮여 주었던 꿈의 헌 옷가지들

나는 푸들푸들 떨고 있다

남아 있는 기력을 지배하는 추억들이여

물컹거리는 어둠에 살을 기대고

여기 몇 해만 더 머무를 수 있겠는가

유배지의 겨울은 일찍 와서

오래까지 질기다

 

 

종신

 

 

이마에 재 뿌리고

쑥향과 빈 촛대 들고

들판으로 갔다

 

나는 밀기울 껍데기로

홑껍데기로

주여,

용서하소서

 

어두움 실핏줄이 터져

못 이길 두려움에 혼절할 듯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주여, 용납하소서

 

바람이 죽은 날들을 닦았다

나는 혼신을 다해

촛대 위로 올랐다

불을 그어다오.

 

 

 

-시집『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1992. 세계사)


 

 

매맞는 자들의 고도  

 

 

변기통 쇠줄에 목을 맨다

양변기를 출출 빠져나가는 물

피인가?

작정했던 닫힌 문이 열리고

다시금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사랑의 분노,

파괴공법을 연구하고 말리라

파괴란 새로운 수단을 냄새 맡는

진주라는 질병이니

지금 어디서 자신의 몸을 뜯어내고 있는

고달픈 자들,

협상할 수 없는 그리움은

끔찍이도 열렬히 가꿔진다

피인가?

 

 

 

익명의 사랑 

 

 

정말 꽃이 되고 싶어, 또는 구름

아홉 배는 내가 더 당신을 사랑할걸---그런 꽃,

새털 옷을 입고 

당신 고향 가는 길 앞질러 따라가는

그런 구름.

석간신문이 배달됐지만 의미가 없네.

죽은 고양이도 쥐떼들의 혼령도

이제 더는 문간 근처를 얼쩡거릴 수가 없어.

꽃의 사랑, 혹은 구름.

정부 쪽에선 비밀에 부치겠지?

군중심리란 게

사랑에 오염된다면 전략은 힘들어지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공기는 느끼지.

바람은 느끼고말고.

내가 당신, 하며

꽃가루를 공중에 뿌려주면 공기들은 명랑해질 거네.

새털 옷은 하늘을 얼마나 기쁘게 할까,

사랑인데.

 

 

 

아름다운 음모 

 

 

무수한 빗변을 그으며 쏟아지던

열병들린 햇살이 살을 찔렀다

"나는 숭숭 구멍난 바람이죠 어디든

앉는 날이 무너지는 날이죠"

정신없이 넝쿨들을 짓밟아 왔네

황소처럼 킁킁거렸네

내 스스로

내 가슴을 환장한 듯 먹어치워

모태로부터 저주받은 북소리

이제 사람의 마을

쓰레기장 먼지 속을 휘휘 돌고 있다

면도날처럼 날카로와진 불면의

밤의 공기들이여

내 혈맥을 잘라 정적의 고삐를 풀겠는가

"팔모로 빛나는 저 별을 봐요

동작을 멈추는 날이 무너지는 날이죠"

 

 

 

안개 통과 

 

 

생이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이제 때가 되었다

아직도 허리께서 뜨듯한 

불을 지핀 흔적의 욕망,

사랑이라는 안개의 냄새로

한 시야 저밖이 움트고 있다고 느꼈으리라

나는 간다

폐가에서는 다시 탄생을 알리는 거미군단들의

바쁜 행보,

분노라는 어미의 고독한 터널의 음부에서

다시 태어나는 나는 

지금은 갈 곳이 두려운 짐승이다

박약한 등뼈를 짐보따리에 우그려 넣다 생각하면

한 시야 저 밖은 아무래도

비로소 늙어 아름다운 날들

나는 간다, 종은 울린다

콧등이 이렇게도 싸아해 두렵기 한이 없는 

해질녘 안개의 냄새

 

 

 

지리한 대화  

 

 

그 탱자나무 울타리, 어머니 생각나세요?

이젠 네 아들이 거기서 놀게다, 네가 뜻을 바꾸거라.

희뜩하니 문지방까지 내려온 하늘... 나는 중얼거리며

돈과 안락한 생활이 모든 인간을 만족시킬 수는 없어요,

어머니가 절 포기하세요.

나는 너를 낳고 온몸에 두드러기로 고생했다.

알아요, 그러셨어요.

바느질감을 내려 놓으시며 어머니, 긴 한숨이 차고 슬프다.

나는 시계를 본다.

왜 이렇게 어수선한지 모르겠군요, 날 좀 내버려둬요.

가족을 버리겠다는 거냐?

가족이 나를 필요로 하진 않아요, 벌써 오래된 일이잖아요.

그건 네가 환상을 꿈꾸어 왔기 때문이야,

이제라도 뜻을 바꾸면 행복해질 게다.

행복? 그래요, 행복...

하늘은 매양 왜 저 모양인지, 나는 집을 나선다.

한 곳으로 몰리던 바람이 저만치 날 밀어다 놓고 골목길 접어 사라진다.

멍든 곳을 훤히 드러낸 나무들 몸통은

어떤 힘으로 겨울을 버티는 걸까.

어머니, 이 손톱 끝을 보세요, 아직도 가시에 찔린 자죽이 시퍼런 걸요.

 

 

 

송신탑이 흠씬 젖어버렸을까  

 

 

  한 마리의 늙은 고양이와 깡마른 초 한자루를 들고 사람들 비 내리는 길을 걸어가고 있다. 어디서 구름기둥 무너지는 소리, 사람들 부르튼 이마께가 조금 젖는다. 고열에 들뜬 어린아이들 흰자위 눈을 뒤집으며 무서운 경짓을 하고, 어른은 그 어린것들을 들춰 업고 가고 있다. 물고기들이 둥둥 떠서 흘러오는 하구의 검고 찐득한 강을 건너 사납고 징그런 독사와 성교를 하는 도시의 거대한 철문도 지나쳐 가고 있다. 장대비, 푸르고 시퍼런 등허리를 슬쩍슬쩍 내보이며 공중을 후려친다. 누가 깡마른 초를 받쳐 불을 그어 당긴다 한들... 빗방울이 스며든다, 송신탑이 저렇게 흠씬 젖어버렸을까. 녹이 슨 기계들은 입을 벌린 채 누워 있구나. 썩어가는 빛은 화려해, 부패하는 냄새는 성감대를 충분히 만족시킨다. 콘크리트 건물들 사이에서 스멀스멀 온몸을 근지럽히는 썩는 빛, 썩어가는 냄새. 산술법으로 환산되는 격조 높은 사람들 걸어가고 있다. 이상한 병동의 어둡고 긴 복도 끝에 질질 신발 끌리는 소리, 몰아쉬는 폐활량은 기대치 훨씬 아래를 어기적거린다. 아버지, 불의 칼침을 내리시는구나, 장대비......

 

 

 

유고시집 '속죄양, 유다'  / 한겨레신문 

 

 

  지난 91년 <작가세계> 가을호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등단해 그해에 첫 시집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을 상재하는 등 의욕적인 활동을 펼치다 지난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연주(1953~1992)씨의 유고시집 <속죄양, 유다>가 세계사에서 나왔다.

 

 첫 시집에서 매음녀로 상징되는 현대 문명의 비인간적이며 부패한 실상을 어둡고 절망적인 어조로 노래했던 시인은 이번 시집에도 절망의 기조를 바탕에 깐 채 죽음에의 예감을 진하게 내비치는 51편의 시를 수록하고 있다.

 

 시인의 절망과 죽음에의 의식이 비롯되는 것은 “가슴 없는 세계”(‘겨울나무가 내 속에서’)에 “내던져진 정체불명의 존재인 나”(‘몰락에의 사랑’)와 세계 자체의 무의미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더럽고 악취나고 부패로 질척거리는/....../실어증의 길”(‘탄생의 머릿돌에 관한 회상’)을 걷는 그는 “위장병이 도지거나 엉치뼈가 쑤시거나/조울증을 심하게 치른다”(‘무덤에서의 기침’).

 

 살 만한 가치가 없어 보이는 세계에서 살 수밖에 없는 현실로 인한 괴로움은 종종 극단적인 자학을 낳기도 한다. “나는 방류된 폐수다/나는 불행에 중독된 쓰레기/나는 썩은 강물이다//나는 나를 낳은 날카로운 밤의 자궁/나는 모친을 살해하는 딸년/제 어미 아랫배에 오물을 쑤셔박는/나는 도시 건설업자다”(‘성자의 권리·9’).

 

 정체불명인 자기 자신과 세계의 무의미성에 대한 두려움, 극단적인 자학 속에서도 시인은 한가닥 희망을 끌어안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출렁인다/성역 같은 내 가슴 심연 속으로/깊이, 더 깊이 가슴살을 조금씩 떼어내며/신선한 산소를 들고 나올 것이다”(‘성자의 권리·9’), “누가 와서 내 집 문을 두드린다/내 몸의 체온으로 뜨거운 차를 한 잔 끓일 수 있을 게다”(‘우렁달팽이의 꿈’), “어렴풋이 기억나는 사람의 가슴 같은 돌에게서/숨쉬는 법을 다시 배우고 싶다”(‘성자의 권리·3).

 

 그러나 저 도저한 절망의 깊이를 메우기에는 이런 희망이란 얼마나 사소하며 나약한 것인지. 절망과 무의미성을 상쇄할 수 있는 희망과 의미의 근거가 되어야 할 사랑조차도 시인에게 있어서는 불안한 죽음의 그림자를 동반하는, 아니 죽음을 잉태한 사랑일 뿐이다. “사랑하는 한 쌍의 남녀가/칙칙한 노트 한 권을 빼곡히 채워놓고/고통으로 죽어서 만난 인연은 슬픔의 별이랄까?/은하......”(‘우리라는 합성어로의 환생’).

 

 이 때문에 시인은 “기어코 사랑은/무덤 파는 인부가 되는 것이네.”(‘적과의 이별’)라거나 “만일 누군가가 아직도 나를 사랑한다면/나는 치사량의 주검”(`만일 누군가가 아직도 나를 사랑한다면')이라고 단언한다.

 

 세상이 더럽고 악할 때 그것을 견딜 수 있는 방법은 두가지뿐이다. 하나는 그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일정한 거리를 둠으로써 자신의 순결을 지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세상이 아무리 추악할지라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에 순응하는 것이다. 이 두가지에 다 실패할 경우 남은 길은 단 하나 죽음뿐이다. 시인은 그 길을 갔다.

 

 그가 자살 직전에 써 두었다는 ‘종신’은, 경우는 다르지만 91년에 타계한 시인 고정희가 마지막으로 남긴 시 ‘독신자’와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시인의 강한 경도를 보여준다.

 

 “이마에 재 뿌리고/쑥향과 빈 촛대 들고/들판으로 갔다.//나는 밀기울 껍데기로/홑껍데기로/주여,/용서하소서.//어두움 실핏줄이 터져/못 이 길 두려움에/혼절할 듯/외마디 소리를 질렀다./주여, 용납하소서.//바람이 죽은 날들을 닦았다./나는 혼신을 다해/촛대 위로 올랐다.//불을 그어다오.” 

 

 

 

이연주 시인

 

1953년 전북 군산에서 출생하였으며 1991년 「작가세계」 가을호에 「가족사진」 외 9편의 시

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91년 첫시집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 출간후에 1992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시집으로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 』(세계사, 1991)과  유고시집  『속죄양,

유다』(세계사, 1993)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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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그녀를 추억하다] 자살한 시인 이연주

이연주는 죽음으로 ‘말하고’ 싶어했다,아니 ‘말하고 싶었으나 말하지못했음을

말하고’ 싶어했다.

치열성과 정직함의 시인 이연주

 

 

1991년에 시인이 됨. 1992년 자살로 생을 마감함. 시집 두 권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

<속죄양, 유다>(유고시집). 기지촌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지켜보았던 매춘여성들의 삶에

적극적으로 동화된 태도로 글을 써나갔던 시인 이연주를 시인 김정란 교수가 추억한다. 자

신의 여성적 정체성을 분명하게 자각했던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치열성과 정직함으로

인하여 저절로 여성적 정체성의 추구라는 문을 향해 걸어갔던 여자. 죽음에 이르도록 간절

하게 시인 이연주가 말하고 싶어했던 것은 무엇일까?

 

나는 시인 이연주를 만나본 적이 없다, 아니, 있다. 어쩌면, 어떤 종류의 질서 안에서는 현

실보다도 더 현실적으로. 그녀가 나를 불렀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그녀를 불렀던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아마도, 아주 먼 갤럭시, 시간 속에서 자유로워질 다른 갤럭시

안에서는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 지혜가 내 머리를 꽃처럼 장식할 어떤 다른 갤럭시에서는.

짧은 두 번의 만남. 현실 속의 만남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 두 번의 만남을 감히 아무런

수식어 없이 만남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나는 그녀를 정말로 만났다고 느낀다.

 

언젠가, 그녀의 시에 대한 아주 짧은 리뷰를 쓴 적이 있다. 부글부글 끓는 에너지의 덩어리

같다는 생각, 그러나 그것이 매우 부정적인 양식으로만 표출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 대

충그런 막연한 기억밖에는 그 원고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 없다. 그런데, 지금은 어디로 가

버렸는지 모르는 그 원고에 대해 내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내가 이연주가 사용

했던아주 이상한 쉼표 하나를 매우 불안해하며 언급했었다는 사실이다.

 

그 쉼표는 적절한 맥락을 찾지 못하고, 맥락을 끊어먹거나, 맥락들 위에 위태하게 걸터앉

아서 마치, 호흡곤란을 호소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그 쉼표가 내 마음에 의문부호

처럼걸린다, 라고 썼었던 것 같다. 그리고, 무슨 연유에서인지 모르지만, 그 글과 함께 고

호의 그림 ‘구두’가 동시에 어김없이 떠오른다.

 

그 그림이 삽화로 사용되었었나? 그러나 그 문학지 편집에 삽화나 이미지가 들어갔던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허공을 향해, 호흡이 곤란하다는 듯, 입을 떡 벌리고 있던 그 쉼표와,

고호의 피곤에 지쳐 너덜너덜 떨어진 구두 두 짝이 이연주를 생각할 때마다 내 가슴에 즉

각적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나는 그 글이 발표되고 나서 얼마 있다가

이연주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쉼표가 갈고리처럼 내 몸 어디엔

가에 박혔다.

 

그리고 또 한번의 만남. 어느 날이었던가. 나는 낮에 깜빡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

다. 낮에 깜빡 잠들었다가, 꿈에서 죽은 이연주를 보았다. 그녀 생전에 한번도 만나본 적

이 없는데도. 세계사 시집 표지에 난 사진 그대로였지만, 통통하고 밝아보였다. 행복한

新婦 같았다.머리에 커다란 진주 나비 장식을 달고 있었다. 그녀가 안녕? 하고 인사했다.

내가 안녕!하고인사했다. 그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선생님, 내 가슴 속에 철사로 된 빽

빽한 말 다발이 들어 있었어요. 그걸 풀어내야 했어요. 그게 날 죽였어요.-김정란, <낮꿈>, 부분

 

죽은 이연주가 내 꿈 속에서 “철사로 된 빽빽한 말다발”이라고 말하던 모습을 나는 지금

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꿈 속에서 내가 “이 말은 대단히 중요해. 반드시 기억해야해”

라고 생각했던 것도 기억난다. 꿈에서 깨어나 나는 한참 동안 가슴을 누르고 있어야 했다.

마치, 그 철사 말다발이 정말로 내 몸을 안으로부터 쿡쿡 찔러대는 것 같았다. 명치끝이

오랫동안 찌르듯이 아팠었다.

 

그리고 나는 오랫동안 울었다. 내 울음이 저승까지 이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너를 위해

서내가 잘 말할 수 있을까? 허공에 목을 매달아 버린 네 잘린 말 대신? 죽음 안으로 몸을

던진 네 철사 말다발의 절망을 내가 이윽고 가닥가닥 한 올씩 풀어내어 나뭇잎처럼 순하

고 아름다운 말의 희망으로 바꾸어 낼 수 있을까? 내 몸 속으로 들어온 네 저승의 전언을

내가세상 사람들의 귓바퀴 가까이 가져갈 수 있을까? 절망은 여전히 내 가슴을 뻑뻑하게

짓누른다. 세상은 여전히 완강하고 나는 여전히 무력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내

명치끝은찌르듯이 아프다.

 

이연주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1953년생. 수간호사. 1991년에 시인이 됨.

1992년 자살로 생을 마감함. 시집 두 권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 <속죄양, 유다>(유

고시집). 그리고 여성문인들을 따라다니는 심술궂은 소문들. 남성문인들은 물론이고 여

성문인들까지 나서서 입을 쫑끗대며 큰일이나 났다는 듯이, 자신들은 모든 궂은 일과는

무관한 왕자마마 공주마마라는 듯이, 새삼스럽게 엄숙한 표정을 짓고, 죽은 자마저도 마

음놓고 씹어제끼며 스캔들을 만들어내는 그 가공할 우아한 무책임한 이빨들. 속물들의

말잔치. 그것이 전부다.

 

나는 그들의 말을 한 마디도 귀기울여 듣지 않는다. 그 말들에는 최소한의 애정도 삶에

대한 진지한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이연주가 1991년 첫 시집을 출판한 다음해인 1992

년에 느닷없이 자살한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자신의 육체에 스스로 죽음을 집행한 자 말고 누가 그 죽음의 이유에 대해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심지어 죽은 자 자신도 진정한 이유는 모를지도 모른다. 모든 죽음은 미

스터리이다. 100살 넘어 자연사한 사람의 죽음도 본질적으로는 미스터리이다. 나는 다

만 이연주가 죽음으로 ‘말하고’ 싶어했다는 것을 마음에 접어둘 뿐이다, 아니다, ‘말하고

싶었으나말하지 못했음을 말하고’ 싶어했다는 것을 짚어둘 뿐이다, 죽음에 이르도록 간

절하게.

 

그녀의 시세계는 어둡고 눅눅하다. 그곳에는 좀벌레가 들끓고, 악몽은 끊임없이 이어지

며,무엇 때문에 사는지 알 수 없는 매음녀들의 너덜너덜 해어진 육체들이 있다. 이연주

시의이러한 부정적 특성에 대해 한 평론가는 ‘위악적’이라는 표지를 붙였지만, 내가 보기

에그것은 단순한 ‘위악’을 넘어선다. 그것은 차라리 치열성의 증거이다. 그녀의 시는 일체

의낭만적 환상을 거부한 채, 가부장제적/자본주의적 ‘위선’의 복판을 겨눈다. ‘위악’은‘위

선’에 대한 소극적/냉소적 뒤집기에 불과하다. 아니, 이연주는 위악적이지 않다.

 

그녀는 그녀가 기지촌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지켜보았던 매춘여성들의 삶에 진짜로 정

말로적극적으로 동화된 태도로 글을 써나갔기 때문이다. 이연주는 단순히 ‘그녀들’을 동

정하거나, ‘그녀들’의 비참을 보고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는다. 그녀는 정말로 ‘그녀들’이

된다. 아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 그녀는 ‘그녀들의 육체들’이 된다. 얻어맞고 착취당

하고 파먹히고 그리고 피를 빨린 뒤에 도시의 하수구에 내던져지는 혼이 없는 살주머니.

그육체들은 욕망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일 뿐이다. 이연주는 그 육체들에 완전히 동화되

어 있었다. 그녀의 시적 자아는 스스로 매음녀가 되어 생의 바닥을 지렁이처럼 기어간다.

 

‘그녀들’과 ‘그녀들의 육체’를 치료하는 간호사 사이에는 아무런 거리도 없다. 이연주는 ‘그

녀들’의 육체와 함께, ‘그녀들’의 육체 안에서 분노하고 절규한다. 남성들의 욕망의 쓰레기

통, 야금야금 파먹힌 뒤에 썩어서 ‘검은 간장’처럼 되어 버리는 수동적 객체. 가부장제의 허

울좋은 일부일처제가 만들어놓은 제도의 허깨비들. 기생하면서 기생당하는 두겹의 소외.

이연주는 그럴 바에는 차라리 한꺼번에 잡아먹으라고 절규한다.

 

차라리 내 간을 빼어 먹어요그렇게 야금야금살점 뜯어먹고 새살 나기 기다리고아이, 그렇

게 말고단숨에 큭, 심장 할켜버려요쿨럭쿨럭 솟구치는 피를 다빨리 마셔 치워줘요- <백치

여인의 노래>, 부분

 

흡혈귀들은 무자비하고 잔인하다. 가부장적 흡혈귀들 앞에 던져진 매음녀들, 자본의 시장

에내걸린 고깃덩어리들은 매일 세계의 벼랑으로 떠밀린다. 삶은, 아무, 의미도 없다.

 

한번의 잠자리 끝에이렇게 살 바엔…왜 살아야 하는지 그녀도 모른다.쥐새끼들이 천장을

갉아댄다.바퀴벌레들과 옴벌레들이 옷가지들 속에서자유롭게 죽어 가거나 알을 깐다. 흐

트러진 이부자리를 들추고 그녀는 매일 아침자신의 시신을 내다버린다, 무서울 것이 없어

져 버린 세상.철근 뒤에 숨어사는 날짐승들이그 시신을 먹는다. -<매음녀1>, 부분

 

이연주의 독창성은 그녀가 여성적 소외의 극한점으로 존재하는 매음녀들의 조건이 도시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적/가부장적 문명의 숨겨진 잔인한 얼굴이라는 것을 파악했다는 점에 있

다. 따라서 ‘매음녀’는 도시의, ‘철근 뒤’의 ‘시장’과 함께 떠올려진다. 그녀의 비참은 상품화된,

사물화된 육체의 비참이다. 그 비참의 근원에는 아버지-페니스의 무한정한 욕망의 추구가

있다. 페니스의 질주하는 욕망의 바퀴 아래에서 매음녀들의 존재는 단지 성기에 불과한 것

으로 축소된다. ‘세모 여자’. 물질화한 아프로디테의 印章. ‘비인칭의 엔트로피’.

 

이연주는 기지촌 여성들의 육체로부터 말을 끌어내어, 말의 빛으로 그녀들을 구원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아마도 그래서 그녀는 문학의 문을 두들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문학을하

기 위해서 거쳐야 했던, 이른바, 세계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등단’이라는 이상한제도는

그녀를 더더욱 절망시켰던 것 같다.

 

‘문단’이라는 신성한 성채는 그녀를 들여놓아주고 동시에 쫓아낸다. 몇 명의 왕들과 그들의

주위를 맴도는 궁인들과 궁녀들. 왕들의 눈에 들기 위한 보이지 않는 기묘한 암투들. 위선의

도시. 그곳에서 이연주는 자신의 처지가 매음녀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깨닫는

다. 말 그릇을 든 동냥 거지. 남성권력자들 앞에서 비루하게 상징성의 성은을 기다려야 하는

비참한 처지. 그녀의 문학은 매음녀들처럼 존재의 일차적 조건 안에 못박혀 있었을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문학을 의미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상징 기제들 안에 진입할 수 없다는 것

을 깨닫는다. 그녀의 문학은 육체처럼 단지 존재할 뿐, 말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그 처

지에 깊이 절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연주가 자신의 여성적 정체성을 분명하게 자각했던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

리는 그녀가 치열성과 정직함으로 인하여 저절로 여성적 정체성의 추구라는 문을 향해 걸

어갔던 모습을 확인한다. 좀더 버텼더라면, 그녀는 힘찬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는 그녀의 죽은 몸-잘린 혀 위에서 출발한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아

주 잘말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녀의 시집을 아기처럼 토닥인다. 죽음 너머까지 내 사랑이

이를것을 나는 믿는다.

 

김정란 시인

여성신문 2003-06-17 00:16: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