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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평 시] 시가 참 많으면서도 적다 / 방민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2. 6.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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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평 시] 시가 참 많으면서도 적다 / 방민호
[57호] 2013년 01월 03일 (목) 방민호 서울대 교수

1.

요즘 시 잡지가 참 많다. 새로 시작한 시 전문지도 많다. 오래된 시 관련 잡지들도 많다. 어떻게 이 많은 책을 다 볼까? 어떻게 좋은 시를 빠짐없이 언급할 수 있을까. 그런 것은 아예 생각하지 않겠다. 내 눈이 미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내 깜냥껏 쓸 수 있는 만큼이나 쓰겠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잡지다, 그렇지 않은 잡지다 하는, 이미 만들어진 이름값을 생각하지 않겠다. 그런 것이 비평에는 다 부담이다. 유명 시인이다, 그렇지 않다 하는 기준도 여기서는 따르지 않으려고 한다. 시를 쓰는 데는 부침이 있게 마련인 때문이다.

 

무엇보다 시 쓰는 사람들을 차별 없이 대하는 태도 하나만을 유지할 수 있다면 월평으로서 이 글은 바로 월평이라는 나쁜 글의 형식을 택한 수준 안에서는 더 나빠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시가 유행을 따르고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도 나는 따져 묻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유행은 지나가게 마련이다. 또 돌아오게도 마련이다.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  새로운 것일수록 옛것에서 찾아 바꾸고 다듬은 것인 경우가 많다. 우리 몸과 마음 안에는 하루짜리 분초 단위짜리 시간도 흐르지만 백 년, 천 년, 만 년짜리 시간도 흘러다니고 있다. 이 사실을 의식할 것이다. 우리 문학사는 깊은 시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 전통의 힘을 중시하고 새롭게 살린 시일수록 더 완전할 수 있다. 나는 이 힘을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것이 갖는 미정형의 가능성도 넓게 헤아려 살펴볼 것이다. 내가 공식적인 비평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94년 말이었다. 헤아려 보니 벌써 17년이나 되었다. 그 사이에 새로운 시인이 숱하게 많이 등장했다. 이 사람들에게서 새로운 무엇인가를 찾아보려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잘 써도 몇몇 한정된 숫자의 시 작품을, 그것이 가능하다면 다시 전문을 실어 소개하는 정도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시작부터 벌써 힘이 빠져버린 것 같은 절망적인 심정으로 이 새로운 글을 쓰고 있다. 시가 참 많으면서도 적디적은 세상이다.

 


2.

필자가 편집위원으로 있는 《문학의오늘》 겨울호를 보니 정기복 시인의 〈용부원리 강신대네 사과밭에는〉이라는 시가 실려 있다. 정기복 시인은 공부는 국립대학에서 국문학을 했는데, 출판사 영업일을 하다 최근에는 일산에서 택시 운전까지 했다. 《어떤 청혼》이라는 시집 한 권으로 근근이 시인의 직업을 버텨오고 있는데, 이번에 내놓은 시는 세파에 시달리는 사람답지 않게 깨끗한 심경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용부원리 강신대네 사과밭에는 시간이 영글어 가고 있다 바람꽃이 지구를 꼬옥 싸안을 때 검은 별들이 들어앉더니 가부좌를 곧게 틀었다 달 없는 밤이면 멧돼지 한 가족이 떼 지어 밭을 일구다 가고 씨줄 날줄로 거미줄이 이슬을 구슬로 엮는 아침이면 가을로 난 길을 걸어 햇살이 와 알알이 스민다 소백산의 높고 낮은 묏등성이들이 볕과 그림자로 번갈아 들여다보노라면 한 무더니 붉은 시절이 익어가고 있다 용부원리 강신대네 밭에는.
—정기복 〈용부원리 강신대네 사과밭에는〉(《문학의오늘》 2012 겨울호)

 

강신대는 그의 시에 가끔 등장하는 고향 친구다. 사과밭을 해서 이 서울 사는 돈 없는 시인이 일을 해주고 품삯을 받기도 한다. 이 시는 이 사과밭에 머물다 간 가을의 이야기다.  시어들이 정갈해서 최근 산문시의 너절한 편향에서 훌쩍 벗어나 있다. 풍경은 그것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의 거울이다. 이 시가 얻어낸 깨끗한 심경 세계는 생활을 승화시켜 얻어낸 것이다.

 


3.

《시산맥》에 실린 시들을 넘겨넘겨 읽어 보는데, 눈에 쑥 들어오는 시가 한 편 있다. 이서화라는 시인의 〈바람 조문〉이라는 시다. 2008년에 등단했으면 꽤나 젊은 시인일 텐데, 사물을 들여다보는 집중력이 놀랍게 느껴진다. 시 전문을 인용해 본다.

 

한적한 국도변에 조화가 떨어져 있다
내막을 모르는 죽음의 뒤끝처럼
누워 있는 화환의 사인은
어느 급정거이거나 기우뚱 기울어진 길의 이유겠지만
국화꽃들은 이미 시들어 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들이 단단하게 여물어가는 잡풀 속
며칠 누워 있었을 화환
삼일 동안 조문을 마치고도 아직 싱싱한 꽃송이들
잡풀 속 어딘가에 죽어 있을
야생의 목숨들 위해
스스로 이쯤에서 떨어진 것은 아닐까
같이 짓물러가자고 같이 말라가자고 누워 있는 화환
보낸 이의 이름도 사라지고
꽃술 같은 근조 글자만 남아 시들어 간다

 

길섶의 강아지풀
기름진 밭에서 밀려난 씨앗들이 누렇게 말라간다
누군가 건드리면 그 틈에 와락 쏟아놓는 눈물처럼
울음이 빠져나간 뒤끝은 늘 건조하다
지금쯤 어느 지병의 망자로 분주했던 며칠의 축제에서
한숨 돌리고 있을 것 같다

 

먼지들이 덮여 있는 화환 위로
뒤늦은 풀씨들이 떨어진다
밟으면 바스락거릴 슬픔도 없이 흘러가는 국도변
가끔 망자와 먼 인연이었다는 듯
화환 근처에 뒤늦게 찾아와 우는 바람소리만 들린다
—이서화 〈바람 조문〉(《시산맥》 2012 겨울호)

 

이 시의 화자는 국도 변에 떨어져 있는 조화(弔花)를 한참 바라보고 서 있다. 시적 정황으로 미루어 이 사람은 버스를 타고 쓱 지나쳐 가면서 이 ‘꽃’을 힐끗 보진 않았던 것 같다. 이 사람은 아마도 국도 변을 걸어 산책을 하거나 어딘가로 가다 이 떨어진 ‘꽃’을 만났을 것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무심히 보고 지나쳤을 ‘꽃’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이 ‘꽃’의 사연을 상상하고, 또 이 ‘꽃’의 분위기를 음미하는 찬찬함이 돋보인다.

나는 이 시와 함께 실린 작은 사진을 보고 이 시인이 남자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여성이라고 한다. 시풍에 남자, 여자가 따로 있지 않겠지만 이 관조적 시선이 ‘여성스럽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4.

《애지》라는 잡지는 청주에서 출판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 잡지는 반경환 평론가의 주재 아래 지속적인 활동을 펼쳐오고 있는데, 월평 때문에 조금 더 자세하게 들여다볼 기회가 생겼다. 이 잡지에 실린 시 가운데, 이서화 시인의 시처럼 죽음에 관한 사유를 담은 시가 한 편 있어 눈길을 끌었다. 윤의섭 시인의 〈부러짐에 대하여〉가 그것이다.

 

죽은 나무는 저항 없이 부러진다
물기가 사라질수록 견고해지고 가벼워지고
아마 죽음이란 초경량을 향한 꼿꼿한 질주일 것이다
무생물의 절단 이후는 대개 극단적이다
잘려나간 컵 손잡이는 웬만하면 혼자 버려지지 않는다
강철보다 무른 쇠가 오래 버티었다면 순전히 운 때문이며
용접 그 최후의 방편은 가장 강제적인 재생 쉽게 주어지지 않는 안락사
수평선 너머 부러진 바다와 구름 사이 조각난 낮달
나는 네게서 얼마나 멀리 부러져 나온 기억일까
갈대는 부러지지 않는다지만 대신 바람이 갈라지고 마는 걸
편린의 날들은 사막으로 치닫는 중이다
이쯤 되면 버려졌다거나 불구가 되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언젠가는 스스로 부러질 때가 있었던 것이고
서로의 단면은 상처이기 전에 폐쇄된 통로일 뿐이라고
둘로 나뉘었으므로 생과 사의 길을 각자 나누어 가졌다고
조금 더 고독해지고 조금 더 지독해진 거라고
부러지고 부러져
더는 부러질 일 없을 때까지 부러
진 거라고
—윤의섭 〈부러짐에 대하여〉(《애지》 2012 겨울호)

 

죽은 나무 부러진 것을 보고 생각에 생각을 이어가는 화자의 집중력이 돋보이는 시다. 나무는 죽으면 삶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로 나아갈 것이다. 이 시의 화자는 이 다른 세계를 예민하게 감지해서 죽음이란 것을 “초경량을 향한 꼿꼿한 질주”라고 표현한다. 그는 그러고 나선 이 죽은 나무의 세계와 동렬에 속하는 물상들에 대한 사유를 펼쳐 나간다. 세상에는 늘 절단이란 사건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이 사유는 일관되거나 일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유를 만들어 가는 집중력은 귀하게 느껴진다. 세상을 겪은 사람의 힘같이 느껴진다.

 


5.

유안진 시인은 연세가 들면서 더 정진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분이다. 시를 쓰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은 시 창작 생활의 여정을 십 년 이상 겪어봐야 알까 말까 한 일일 것이다. 이번에도 여러 곳에서 시 발표한 것을 보았는데, 이 가운데 《문학과창작》에 실린 〈두 친구의 다른 행복〉은 평범한 것 같은 외양 속에 인생의 진실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담아내고 있다.

 

두 친구가 같은 시기에 다른 장관직을 제의받았다
한 친구는 위암 3기 통보를 다른 친구는 대장암 3기의 통보를 받은 이들이었다

 

위암 친구는 장관직을 수락하고 업무 중 짬짬이 치료도 받았지만 효험 없이 죽고 말았으나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수술치료로 건강이 회복된 대장암 친구는
첫 돌 지난 손녀를 업고 아침에는 출근하는 며느리를 정류장까지 환송하고
낮에는 공원을 산책하며, 아기에게 나무와 꽃과 풀의 이름을 일러주고, 만져보게 하며, 그것들에 얽힌 얘기를 들려주고, 같이 낮잠 자고 같이 책도 읽고 장난치고 놀다가, 다시 손녀를 업고 퇴근하는 며느리를 마중 나가는 일과를 보낸다고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지 두려울 때가 있다고 한다
—유안진 〈두 친구의 다른 행복〉(《문학과창작》 2012 겨울호)

 

이 시는 유안진 시인의 시로서는 리듬도, 이미지도 최소화해서 시적인 멋이 없는 듯한 형태로 만들어낸 것이다. 이 시인은 요즘 아주 짧게도 쓰지만 시를 낭송할 때 들어 보면 항상 리듬을 의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그런 요소들을 과단성 있게 삭감해 버리고 하나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그릇처럼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친구의 다른 행복〉은 사람이 삶과 죽음 사이의 얇은 경계선 안에서 산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삶은 욕망을 만들고 이것 앞에서 사람들은 죽음마저 망각해 버리기조차 한다. 그러나 죽음이 우리 바로 곁에 있다. 우리가 다만 의식하지 못할 뿐. 삶과 욕망을 대하는 두 사람의 서로 다른 방법을 보면서 나는 이 짧은 삶의 시간 앞에서 정말 겸허해야 한다고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6.

장이지라는 시인은 2000년에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공식적으로만 따져도 벌써 십 년 넘는 시력을 가졌는데 내가 잘 몰랐었다는 게 이상한 일일까? 알려진 곳에서는 이미 그 실력을 충분히 인정받고 남음이 있어 보인다. 시에서 도대체 실력이라는 게 뭔가? 그것은 시를 만들어 가는 구성 능력일 뿐만 아니라 의식의 날카로움이다. 아무리 부드러운 생각도, 아무리 사랑에 미친 사람도 날카롭지 않으면 제 맛을 낼 수 없다.
이 시인의 시에는 날이 서 있다. 세상을 겪고 판단하는 시선이 만만찮음이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쉽게 내지르지 않는다. 《문학과창작》에 실린 〈플랫〉이라는 시가 그렇다.

 

꿈에 나는 SMS로 해고통지를 받는다.

꿈에 나는 이력서를 쓰고
몇 번인가 면접장에 나간다.
한번은 갑자기
영어로 자기소개를 하라고 해서
나는 말벌에 쏘인 것처럼 굳어버린다.
한번은 국문학은 인기가 없다는 힐난에
나는 경영학 전공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내 의지가 아니고
상징조작자의 장난이었다.

 

꿈에 나는 〈피터팬의 구직난〉이라는 시를 쓰고
발표하지는 않는다.
꿈에 나는 면접장에 팬티만 입고 나갔다가 쫓겨난다.

 

꿈에 나는 취업을 했다가
그 다음 날 SMS로 해고통지를 받는다.
누구도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동창회에 온 친구들은
재테크 이야기만 하고 나는 못 마시는 술만 마신다.

세상에 그렇게나 많은 통장 이름이 있다니.
그러나 이것은 꿈이다.

 

자고 일어나면 다시
플랫이다.
플랫에서 나는 직장이 없고
아마도 〈플랫〉이라는 시를 쓰게 되어 있는 것 같다.
—장이지 〈플랫〉(《문학과창작》 2012 겨울호)

 

이 시인은 여기서도 저기서도 〈플랫〉이라는 제목을 가진 시를 쓰고 있다. 그는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플랫은 plat인가, flat인가? 이것은 다른 시들까지 다 봐야겠지만 나는 여기서 그냥 flat이라 해두자. 그러면 이것은 일종의 평면이다. 넓게 펼쳐진 평지이고 판판한 면이다. 이 뜻이 아니었다면 이 시인은 죄송하지만 빨리 연락해 주시기 바란다. 비평가의 실수를 수수방관하지 말고.

 

flat은 마치 매트릭스 같은 영화를 보는 느낌을 자아내는 말이다. 그것은 사막 같기도 한데 여기서 한 발 더 나간 가망 없는 세상을 표상하는 말처럼 들린다. 위의 이 〈플랫〉에서 화자는 실업이라면 평면에 갇혀 버렸다. 가둔 경계가 없지만 영원히 갇혀 있는 것 같은 강박관념 속에서 시인은 ‘무의식’의 저층에까지 내려간 ‘실업’을 맛본다. ‘무의식’의 수렁은 화자를 헤어나지 못하게 한다. 그것은 개펄 같다. 개미지옥 같은 것이고, 점점 빨려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모래무덤 같다.

 

이 화자는 정말 시인 자신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시인은 타자의 세계를 깊이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다. 송경동 시가 안쓰러운 것은 의식으로 싸우기 때문이다. 내지르기 때문이다. 고통이 내면화된 상태를 표현할 수 있는 시적 형태, 그 발화법을 익혀야 한다. 그래야 시간이 흐르고 난 다음에도 시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7.

《시에》라는 잡지는 양문규 시인이 주재한다. 그는 실천문학사에서 오래 일했고 지금은 고향인 충북 영동에 가서 인삼밭을 하고 있다. 나는 《실천문학》 편집위원을 할 때 그를 알기 시작해서 지금 만나지는 못하지만 추석 때나 설 때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주고받기도 한다.

 

한 사람이 잡지 세계를 만들어 가는 일은 쉽지 않다. 누군가 돈을 대서 도와주는 사람 없이 해나가기란 더욱 어렵다. 숱한 문제들이 생겨나고 일손도 달린다. 그런데 지금까지 계속해서 책이 나온다. 면면을 살펴보니 참 많은 시인, 수필가들이 모여 있다. 높은 사람만 살라는 세상 아닌 것을 이 잡지가 잘 보여준다. 이런 세상 속에서 좋은 시인들, 남들이 알아봐야 하는 시인들이 생겨나기 바란다. 나도 그 가운데 들어 있는 것 같다. 이 책 겨울호를 보니 김현희라는 시인이 있다. 2012년 〈평화신문〉 신춘문예 당선자다. 〈아궁이의 취향〉이라는 시는 어딘지 모르게 에로틱한 느낌마저 선사한다.

 

불을 살리고 죽이는 일은
장작이 아닌 아궁이의 힘

 

차곡차곡 나무를 쌓아올려 엉성한
피라미드를 만든 후
신문지 반쪽으로 불의 출발을 알린다
불꽃을 왕성하게 하거나 사그라지게 하는 건
오로지 아궁이의 마음
숨쉬기 좋은 날 햇빛 맑은 날이면
유순한 불길 순한 불씨도
바람의 호흡이 거칠어지면 덩달아 여기저기
사나운 꽃을 피워 올린다
장작이 숨긴 작은 습기에도
숨통을 닫아버리는 아궁이의 생각은 건조하다
굴뚝으로 역류된 바람에 왈칵
울분을 삼키지 않고 뱉어 버리는 불구멍
볏짚 아카시 소나무 잔가지들 한 아름 밀어 넣어도
불같은 뚝심을 뚫어야만
불 맛을 볼 수 있는 가마솥과 아랫목
아궁이가 좋아하는 바싹 마른 소나무

입맛에 맞으면 탁, 탁, 탁, 즐거운 소리로 답한다

 

아궁이의 취향을 통과한
꽃불의 열렬함과 뒷불의 은근함에 지친 허리를 편다
—김현희 〈아궁이의 취향〉(《시에》 2012 겨울호)

 

이 시의 화자는 참 마음이 따뜻하다. 사물을 쳐다봐도 앞에서 쭉 논의해 온 다른 시인들과는 확실히 다른 감성이 느껴진다. 불을 살리고 죽이는 것이 장작 아니라 아궁이의 힘이라는 시구는 확실히 어떤 여성적인 힘을 과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시의 힘은 에로티시즘 쪽으로 빠져나가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아궁이 앞에서 불을 때는 사람의 상념 세계에 머무르는 듯하지만 또 과연 그런가. 상징은 가시적인 것 가운데 볼 수 없는 것이 느껴지게 한다. 알레고리는 그 반대다. 이 시에 나타나는 불이며, 장작이며, 아궁이는 다만 그것 자체일 뿐일까?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시는 여전히 가시적인 세계 속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이것이 이 시의 은근한 힘이고 기운이다. 이 시인은 이 삭막한 세상에 나서도 따뜻한 체온을 아직 잃지 않았다. 
 

 

방민호
rady@snu.ac.kr / 문학평론가·시인. 서울대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 1994년 《창작과 비평》(평론), 2001년 《현대시》(시)로 등단. 저서로 《비평의 도그마를 넘어》 《납함 아래의 침묵》 《문명의 감각》 등과 시집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가 있다. 유심작품상, 김환태평론상 등 수상. 현재 서울대 국문과 교수.

 

 

<유심 홈에서 가져옴>

http://www.yousim.co.kr/news/articleView.html?idxno=6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