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 감정
최정례
수박은 가게에 쌓여서도 익지요
익다 못해 늙지요
검은 줄무늬에 갇혀
수박은
속은 타서 붉고 씨는 검고
말은 안 하지요 결국 못하지요
그걸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봐요
나귀가 수박을 싣고 갔어요
방울을 잘랑이며 타클라마칸 사막 오아시스
백양나무 가로수 사이로 거긴 아직도
나귀가 교통수단이지요
시장엔 은반지 금반지 세공사들이
무언가 되고 싶어 엎드려 있지요
될 수 없는 무엇이 되고 싶어
그들은 거기서 나는 여기서 죽지요
그들은 거기서 살았고 나는 여기서 살았지요
살았던가요, 나? 사막서?
레바논에서?
폭탄 구멍 뚫린 집들을 배경으로
베일 쓴 여자들이 자나가지요
퀭한 눈을 번득이며 오락가락 갈매기처럼
그게 바로 나였는지도 모르지요
내가 쓴 편지가 갈가리 찢겨져
답장 대신 돌아왔을 때
꿈이 현실 같아서
그때는 현실이 아니라고 우겼는데
그것도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요?
세상의 모든 애인은 옛애인이 되지요*
옛애인은 다 금의환향하고 옛애인은 번쩍이는 차를 타고
옛애인은 레바논으로 가 왕이 되지요
레바논으로 가 외국어로 떠들고 또 결혼을 하지요
옛애인은 아빠가 되고 옛애인은 씨익 웃지요
검은 입술에 하얀 이빨
옛애인들은 왜 죽지 않는 걸까요
죽어도 왜 gm르지 않는 걸까요
사막 건너에서 바람처럼 불어오지요
잊을 만하면 바람은 구름을 불러 띄우지요
구름은 뜨고 구름은 흐르고 구름은 붉게 울지요
얼굴을 감싸 쥐고 징징거리다
눈을 홀기고 결국
오늘은 종일 비가 왔어요
그걸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봐요
그걸 레바논 구름이라 할까봐요
떴다 내리는
그걸 레바논이라 합시다 그럽시다
*박정대의 시 한 구절을 빌어.
-현대문학상 수상시집『피어라, 석유!』(현대문학,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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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의 감정
백상웅
정거장에 서서 방금 스쳐간 냄새를 떠올린다.
잠 못 이룰 때가 있었다.
어느 창문 밑을 지나며 맡은 냄새가 약간 탄 계란찜 냄새였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까지
엄마가 가졌던 부엌들
옛 애인의 목도리
나무 밑동을 뒤덮은 이끼
밥 짓는 골목의 구조
장맛비에 방에서 말리는 빨래……
불변의 화학원소가 콧속의 감각 깨우는 이 순간.
이게 누구…… 냄새였더라?
나는 나의 과거 어느 순간, 짙은 농도로 가슴 속에 지문을 찍어놓았을 사
랑이라든지
벼락치기 직전 얼룩진 하늘
찌릿찌릿한 나무
우산을 막 삼키는 바람
슬픈 사람처럼 땅을 움켜쥔 뿌리……
버스를 기다리는 이 시간, 평생을 걸쳐 나를 따라오는 물질을 떠올린다.
-계간『시와반시』(201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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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의 감정
임경묵
바바리맨이 올 시간이다
입구에서부터 알은체를 했는데
골목이 딴전을 피운다
바람이 저글링 하던 검은 비닐봉지가 골목의 오후를 툭툭 차고 돌아다닌다
민달팽이가 사철나무 울타리 그늘에 꼼짝없이 붙들려 있다
허기진 저녁에 풍덩 발을 담그면
서너 집 건너 악다구니로 싸우는 소리, 집어던진 세간들 쨍 짱 탁 부딪히는 소리, 흐느껴 울다가 까르르 웃는 소리, 한껏 볼륨을 높이고 달려오는 라디오 소리
그리고,
빈집에 삼삼오오 모여 골목의 안색을 살피며
본드를 불던 아이들
재개발지구 지정 안내판이 들어서자
집들은 하나둘 떠나갔다
골목도 이제 남은 골목을 거의 다 써 버린 듯하다
중학교 때
여기 사는 게 부끄러워
친구들에게 골목에 대해 부풀려 말한 적이 있다
일기예보에 한때 우박이 내린다고 했는데
섬모 같은 빗줄기가 비칠거린다
검은 비닐봉지가 맨홀 뚜껑에 납작 엎드려 있다
철거 딱지가 붙은 판잣집이, 거웃만 가린 담장이, 무당집 붉은 깃발이 젖는다
나팔꽃이 담장을 넘다가 들킨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젖는다
저녁이 골목을 내려간다
비 맞은 검은 비닐봉지와 사철나무와 민달팽이와 판잣집과 무당집 붉은 깃발과 나팔꽃과 바바리맨을 데리고
부스럼투성이 잡귀가 되어
뿌연 어둠을 일으키며 내려간다
나는 아직 이 골목에 소속되어 있다
ㅡ시집『체 게바라 치킨 집』(시인수첩,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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