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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엄한 모자 / 이기홍 - 넥타이 / 박성우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3. 7.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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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엄한 모자

 

이기홍

 


오늘 예식장에 그를 데려가기로 합니다
그는 내 가슴속에 살면서도
맨 위에 올라가 군림하기를 좋아합니다
어쩌면 그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끔, 내 든든한 밑바탕이 되어주는 그가
차갑고 근엄한 얼굴을 치켜들면
사람들은 그에게 다가가
다소곳이 머리를 조아립니다
예식장에 초대받아 온 사람들도
나보다는 그에게
더 깊은 관심을 표하기도 해 속이 몹시 상합니다
이제 그가 없으면 나는
사람들의 괄호 밖으로 밀려날지 모릅니다
그래서 난 왜 그의 보디가드가 됐습니다
그의 뾰족한 코가 땅바닥에 곤두박질치진 않을까
낯선 바람에라도 끌려가 낭패를 당하지 않을까
조금도 맘 놓지 못하고 그를 지켜봐야 합니다
슬그머니 내 위까지 올라와 상전이 된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나 나는 이렇게
나와 다르게 살아야 하나요
그를 몰아내고 청바지 입기를 좋아하는
나를 데려올 수는 없나요

 

 

 

(200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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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넥타이


  박성우

 

 

  늘어지는 혀를 잘라 넥타이를 만들었다
 
  사내는 초침처럼 초조하게 넥타이를 맸다 말은 삐뚤어지게 해도 넥

타이는 똑바로 매라, 사내는 와이셔츠 깃에 둘러맨 넥타이를 조였다
넥타이가 된 사내는 분침처럼 분주하게 출근을 했다

 

  회의시간에 업무보고를 할 때도 경쟁업체를 물리치고 계약을 성사
시킬 때도 넥타이는 빛났다 넥타이는 제법 근사하게 빛나는 넥타이가
되어갔다 심지어 노래방에서 넥타이를 풀었을 때도 넥타이는 단연 빛
났다

 

  넥타이는 점점 늘어졌다 넥타이는 어제보다 더 늘어져 막차를 타고
퇴근했다 그냥 말없이 살아 넌 늘어질 혀가 없어, 넥타이는 근엄한 표
정으로 차창에 비치는 낯빛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넥타이를 잡고 매달
리던 아이들은 넥타이처럼 반듯하게 자라주었다
 

  귀가한 넥타이는 이제 한낱 넥타이에 불과하므로 가족들은 늘어진
넥타이 따위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계간『애지』(2013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