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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시 모음 -기형도/허수경/이재무/안도현/최금진/조용미/김종철/장무령/강정애/이위발...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3. 13.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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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기형도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열풍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시 반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 패 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간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 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 들어온 것들의 인사人事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아이를 지울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소읍小邑은 무서우리 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봄날이 가면 그뿐

숙취는 몇 장 지전 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 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는지

 

 


-시집『입 속의 검은 입』(문학과지성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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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허수경

 


사카린같이 스며들던 상처야
박분의 햇살아
연분홍 졸음 같은 낮술 마음 졸이던 소풍아
안타까움보다 더 광포한 세월아
순교의 순정아
나 이제 시시껄렁으로 가려고 하네
시시껄렁이 나를 먹여살릴 때까지

 

 


-시집『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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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이재무

 


봄날 오후 투명한 햇살
이런 날은 저승의 안방에까지도
훤하게 보일 듯하다
물 오른 신입생들의 통통 튀는 종아리
반짝이는 소음으로 세상은 청년이 된다
점심 거르고 전투처럼 치러낸 강의
내 달변의 혓바닥에 실린
진실의 질량은 얼마나 될까
불쑥 허기 몰려와 몸,휘청거린다
먼 곳에서 크고 작은 길들은
꼿꼿이 고개 쳐들고 어디론가 바삐
달리고 있다 내가 뱉어낸 그 많은
장식의 허언들은 붕붕거리며 긴 복도
서성이거나 휴게실 담배연기 자욱한
소음에 갇혀 날개 다친 나비처럼 비틀,
부유하고 있을 것이다
봄날 오후 햇살은 투명해서
이런 날은 맨살에 비단을 걸쳐도
아플 것이다
하지만 변한 것은 없다 밥그릇
비워내지 못하는 날이 늘어갈 뿐,
체중은 줄지 않고
누구의 안부도 그리 간절하지가 않다
꽃처럼 화들짝 피어나 한 순간의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저 웃음의 화원 속으로
아직도 겨울을 다 보내지 못한
두꺼운 몸 밀어 넣으며
물 밖으로 아가미 내민 물고기처럼
헉,가쁜 숨 몰아쉰다
모든 게 봄날 투명한 햇살 탓이다

 

 


-시집『푸른 고집』(천년의 시작.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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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안도현

 


늙은 도둑놈처럼 시커멓게 생긴
보리밭가에서 떠나지 않고 서 있는 살구나무에
꽃잎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자고 나면 살구나무 가지마다 다닥다닥
누가 꽃잎을 갖다 붙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쓸데없는 일을 하는 그가 누구인지
꽃잎을 자꾸자꾸 이어붙여 어쩌겠다는 것인지
나는 매일 살구나무 가까이 다가 갔으나
꽃잎과 꽃잎 사이 아무도 모르게
봄날은 가고 있었다
나는 흐드득 지는 살구꽃을 손으로 받아들다가
또 입으로 받아먹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는데


어느날 들판 한가운데
살구나무에다 돛을 만들어 달고 떠나려는
한척의 커다란 범선을 보았다
살구꽃 피우던 그가 거기 타고 있을 것 같았다
멀리까지 보리밭이 파도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서 가서 저 배를 밀어주어야 하나
저 배 위에 나도 훌쩍 몸을 실어야 하나
살구꽃이 땅에 흰 보자기를 다 펼쳐놓을 때까지
나는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집『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창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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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최금진

 


사슴농장에 갔었네
혈색 좋은 사과나무 아래서
할아버지는 그중 튼튼한 놈을 돈 주고 샀네
순한 잇몸을 드러내며 사슴은 웃고 있었네
봄이 가고 있어요, 농장주인의 붉은 빰은
길들여진 친절함을 연방 씰룩거리고 있었네
할아버지는 사슴의 엉덩이를 치며 흰 틀니를 번뜩였네
내 너를 마시고 回春할 것이니
먼저 온 사람들 너덧은 빨대처럼 생긴 주둥이를
컵에 박고 한잔씩 벌겋게 들이키고 있었네
사과나무꽃 그늘이 사람들 몸속에 옮겨 앉았네
쭉 들이켜세요, 사슴은 누워 꿈을 꾸는 듯했네
사람들 두상은 모두 말처럼 길쭉해서 어떤 악의도 없었네
누군가 입가를 문질러 닦을 때마다
꽃잎이 묻어났네, 정말 봄날이 가는 동안
뿔 잘리고 유리처럼 투명해진 사슴의 머리통에
사과나무 가지들이 대신 걸리고
할아버지 얼굴은 통통하게 피가 올라 출렁거렸네
늙은 돼지 몇마리를 몰고 나와 배웅하는 농장주인과
순록떼처럼 킁킁 웃으며 돌아가는 사람들 뒤
사과꽃잎에 핏물자국 번지며 봄날이 가고 있었네

 


-시집『새들의 역사』(창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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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조용미

 

 

내가 보낸 삼월을 무엇이라 해야 하나

이월 매화에 춘설이 난분분했다고, 봄비가 또 그 매화 봉오리를 적셨다고

어느 날은 춘풍이 하도 매워 매화 잎을 여럿 떨어뜨렸다고

하여 매화 보러 길 떠났다 바람이 찬 하루는
허공을 쓸어 담듯 손을 뻗어 빈손을 움켜쥐어보며 종일 누워 있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저 한 순간과 다음 순간 사이의 빈틈에서 별똥별이 두 번이나 떨어졌다고 해야 하나

무슨 귀하고 애틋한 것이 지상에서 사라지는지 별똥별이

몸을 누이고 있었던 그 적막한 날의 客窓으로

한 번은 길에 또 한 번은 짧게 안으로 쏟아지듯 스러졌다고 말해야 할지

 
내가 알 수 없는 그 일이 여러 날 마음을 지그시 누르며

어릿어릿 사람을 아프게 했다고 할까

 
내가 보낸 삼원은 그리하여 그늘도, 꽃도, 적막함도, 가파름도 함께였는데

삼월이 간다고, 괜히 봄비 내리는 저녁을 탓한다네

별똥별이 떨어진 그날 무엇이 내게로 와 사라진다 말할 건지

긴 저녁의 빗소리로 삼월을 마저 보내면 나는 또 누구의 눈앞에서 별똥별 같은 것이 되어

 
삼월이 아주 간다고 그렇게 말하며 스러지게 되는 걸까

내게 그리움이 찾아들었다고, 서러움이 다시 시작되었노라고

알 수 없는 가파른 그 높이를 천천히 한 걸음씩 다 걸어가보아야 할 거라고

나는 내게 나지막이 밤하늘을 바라보며 그렇게 속삭일  뿐

 

 

 

-시집『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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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김종철

 


꽃이 지고 있습니다

한 스무 해쯤 꽃 진 자리에

그냥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일 마음 같진 않지만

깨달음 없이 산다는 게

얼마나 축복 받은 일인가 알게 되었습니다

한 순간 깨침에 꽃 피었다

가진 것 다 잃어버린

저기 저, 발가숭이 봄!

쯧쯧

혀끝에서 먼저 낙화합니다

 

 


-시집『못의 귀향』(도서출판 시학.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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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장무령

 

   

부검의에 따르면 좌측 뇌를 내려친

둔기에 묻은 혈흔의 철공소 사장

김갑수씨가 부도난 수표를 들고 찾아간

수완 좋은 아내 덕에 외제차 타는

고등학교 동창 서윤섭씨가 샛길에 몰래 피운

개나리 이미영씨는 별거중인 남편을 따라간

유치원생 딸아이 옷에 떨어진 벚꽃이

독한 감기약처럼 몽롱한 먼 소리를 따라

빠져나간 창문 너머 날카로운 화염

이천십일년 사월십일일 화장장 3호실을

탈탈 털고 걸어 나오는

화창한

 

 

 

-계간『문학과 의식』(201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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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날은 간다


  강정애
  

 

  마당 시멘트바닥에 찍힌 고양이 발자국

  한 잎 한 잎 떨어진 꽃잎 같다

  지난 봄 떨어진 꽃잎인데

  올해까지 시들지 않았다

 
  문을 열면 황급히 돌아 나가는

  허공 발자국 소리가 있고

  세로로 세운 눈빛

  발자국 속에 어둠으로 말라있던 한파도 다 지나갔다

  나뭇가지만 서성거렸던 보폭들이 화르르 뛰어내린다

  지나가는 꽃송이들,

  잘못 들어선 듯 머뭇거린 흔적이

  군데군데 헌 신발처럼 남아있다
 

  시멘트 바닥에 또각또각 꽃피워 놓고

  그 가벼운 꽃송이 마다 햇살을 발라내는 적요의 나절

 
  담을 넘는 초록들과 훌쩍 단숨에 돋음 한 고양이의 척추와 털 고

르기를 하고 있는 햇볕

  하루에도 몇 명의 아이들이 다녀가는

  癡?가 지키는 집

  물기가 가득 차 빈방이 없는 꽃나무마다

  몸을 헐어 음각이 되는 발자국들,

 
  낭떠러지 위 벗어놓았던 신발은 아이가 다시 신고 내려오고 구겨
지던 울음이 낮잠에 들어 있다

  구름이 박힌 하늘이 천천히 유영하고 있다.

  오후가 되면 저 구름도

  막대 사탕처럼 다 녹을 것 같다.

 

 


(2011년 신춘문예 당선시인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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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이위발

 

 

차지도 덥지도 않은 적당한 두께의 나른함을 덮고

깊지도 얕지도 않은 적당한 술잔에 애틋함을 담아
 

가랑비가 솔솔 내리듯

여인이 나풀나풀 움직이듯

취중은 장자인지 나비인지 모를

몽롱한 꿈을 꾸듯

 
사람이 사람에게로 가는

 

 

 

-반년간『시에티카』(2012년 상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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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3

 

신순말

 

 

멀리서 보는 풍경은 아름답다

당신과 나의 거리는

아름다움만을 바라보기엔

지치도록 가까웠던 모양

 

풀밭을 건너고 물결을 지나고

아득해지기 바로 전쯤의 그 건너편에

나와 당신 마주 서있던 날

 

아득한만큼의 그 거리가

그리움이었다

 

꽃들 피어,

지는 것도 아름다운 이 봄날

 

멀리서보는 풍경은 언제나 더 아름답다

 

 

 

―들문학제25상주들문학회(세종기획, 2018)

 


봄날은 간다

이외수


부끄러워라
내가 쓰는 글들은
아직 썩어 가는 세상의
방부제가 되지 못하고
내가 흘린 눈물은
아직 고통받는 이들의
진통제가 되지 못하네
돌아보면 오십 평생
파지만 가득하고
아뿔사
또 한 해
어느 새 유채꽃 한 바지게 짊어지고
저기 언덕 너머로 사라지는 봄날이여



―이외수 시화집그리움도 화석이 된다 (고려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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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날은 간다


  박강

 


  날씨 좋은 날에 우리는 날씨를 탓하는 욕망을 가졌습니다 빵 봉지 속에선 겨울잠을 자던 곰팡이가 깨어나고 변성하는 목소리로 꽃봉오리가 마른기침을 뱉던 날들 부화를 꿈꾼 새들에게 우리는 어쩌면 변덕스런 봄기운이 몰아닥칠 거라고 공복 시의 몇몇 생존법을 적어두었습니다 붉은 새들의 동공에 봄 아지랑이가 어지럽게 피어오릅니다 먼저 강바닥이 마르면 한결 벌레들을 잡아먹기가 쉬워지겠지요 그건 긍정의 힘입니다 라고 애꾸눈의 선생이 외쳤지만 우리는 우리의 남은 한쪽 눈을 찌를 수 있는 신화 속 왕을 추대하며 긴긴 겨울밤을 버텼습니다 여차하면 우리는 맹인이 될 수 있고 쩍쩍 갈라진 강바닥을 지팡이 없이 기고 건너며 날씨를 탓하는 욕망을 노래할지 모릅니다 손 하나를 잘라서 광장에 걸어두고 남은 손으로 짧아지는 밤마다 자위를 할 수도 있습니다 위독한 자들은 아침저녁으로 속옷을 갈아입고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명함을 파종하듯 뿌려댑니다 잡초가 자랍니다 제초제를 실은 비행기가 시동을 겁니다 그걸 모르지 않지만 우리도 눈에는 눈의 심정으로 두 눈을 감고 나무 뿌리가 자라나는 방향을 손금에 새길 수 있습니다 손에 못을 뚫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사월이 가고 오월이 오면 실개천에 우리의 피를 먹고 자란 철쭉이 피어나겠지요 그렇게 봄날은 갑니다

 


 

ㅡ계간『발견』 (2013년 여름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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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렇게 봄날은 간다


이재무

 

 

아내한테 꾸중 듣고
집 나와 하릴없이 공원 배회하다가
벤치에 앉아 울리지 않는 핸드폰 폴더
괜스레 열었다 닫고
울타리 따라 환하게 핀 꽃들 바라보다가
꽃 속에서 작년 재작년 죽은 이들
웃음소리 불쑥 들려와 깜짝 놀랐다가
흘러간 옛 노래 입 속으로만
흥얼, 흥얼거리다가 떠나간 애인들
어디서 무얼 지지고 볶으며 사나
추억의 페이지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는데
갑자기 요란스레 핸드폰 자지러진다
"아니, 싸게 들어와 밥 안 먹고 뭐해요?"
아내의 울화 어지간히 풀린 모양이다

 

 


―시집『몸에 피는 꽃』(1996,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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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구양숙



이렇듯 흐린 날엔 누가

문 앞에 와서

내 이름을 불러주면 좋겠다


보고 싶다고 꽃나무 아래라고

술 마시다가

목소리 보내오면 좋겠다


난리 난 듯 온 천지가 꽃이라도

아직은 니가 더 이쁘다고

거짓말도 해 주면 좋겠다




―시집『봄날은 간다』(도서출판 그루,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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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손노원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ㅡ가요『백설희 데뷔곡』(유니버살레코드, 19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