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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길 - 문정희, 유재영, 이재무, 문수영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3. 22.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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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


문정희
 
 

나의 신 속에 신이 있다
이 먼 길을 내가 걸어오다니
어디에도 아는 길은 없었다
그냥 신을 신고 걸어왔을 뿐
 

처음 걷기를 배운 날부터
지상과 나 사이에는 신이 있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뒤뚱거리며
여기까지 왔을 뿐
 

새들은 얼마나 가벼운 신을 신었을까
바람이나 강물은 또 무슨 신을 신었을까
 

아직도 나무 뿌리처럼 지혜롭고 든든하지 못한
나의 발이 살고 있는 신
이제 벗어도 될까 강가에 앉아
저 물살 같은 자유를 배울 수는 없을까
생각해보지만
삶이란 비상을 거부하는
가파른 계단
나 오늘 이 먼 곳에 와 비로소
두려운 이름 신이여!를 발음해본다
 

이리도 간절히 지상을 걷고 싶은
나의 신 속에 신이 살고 있다

 

 

 
-시집『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민음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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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


유재영

 

 

세들어 살던 떡갈나무 숲을 비우고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오소리 가족이 있다


지난 밤 먹을 것을 구하러 인가 가까이 갔던

막내는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힐끗 뒤돌아본 떡갈나무 숲에는

벌써 흰 눈이 쌓이고 있었다

 
은 스푼 같은 달이 뜨는 곳,

 

 


-계간『시와 시학』 (2005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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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


이재무

 

 

이 세상 가장 먼 길


내가 내게로 돌아가는 길


나는 나로부터 너무 멀리 걸어왔다


내가 나로부터 멀어지는 동안


몸속 유숙하던 그 많은,


허황된 것들로


때로 황홀했고 때로 괴로웠다


어느날 문득 내게로 돌아가는 날


길의 초입에서 서서 나는 또,


태어나 처음 둥지를 떠나는 새처럼


분홍빛 설렘과 푸른 두려움으로


벌겋게 상기된 얼굴, 괜시리


주먹 폈다 쥐었다 하고 있을 것이다

 


-시집『저녁 6시』(창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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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

 

문수영

 


먼지를 닦아내고 허전함 걷어내고 그림을 걸기 위해 벽에다 못을 칩니다
아무나 가 닿지 못할 허공인 줄 모르고
버티는 벽 속엔 무엇이 숨어 있기에 번번이 내 마음 튀겨져 나오나요?
액자 속 망초꽃들은 우수수 지는데……
어쩌면 나 모르는 박쥐의 집이 있어 햇살에 눈이 부셔 창문을 닫은 걸까요
오늘도 몸 웅크리고 밤이 오길 기다리며
어둠 하나 보지 못한 그런 눈을 갖고서 날마다 겉모습만 꾸미고 살았으니
한 뼘도 안 되는 거리가 참 아득한 강입니다
비지땀 흘리면서 내일은 산에 올라 내 안에 흐린 안개 죄다 풀어내고 싶습니다
발 뻗고 누웠던 집이 상처위에 핀 꽃이라니!
 

 


(2005 중앙시조 년말 장원작)
-시집『푸른 그늘』.책만드는집.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