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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우리속담 ② -내 안의 분노를 다스려야 하는 이유 / 제 언치 뜯는 말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3. 27.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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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에게 학교 폭력에 대해 강의를 하는 한 선생님이 다음과 같은 경험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신청자가 없어 취소될 뻔한 강의가 있었는데 막상 강의실에 가 보니 수십 명의 교사들이 화난 얼굴로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사정을 짐작한 이 선생님이 "여러분들, 누구한테 화를 내고 오셨습니까?"라고 묻자 모두들 누구에게도 화를 내지 않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갑자기 강의에 참석하라고 지시한 교장, 학교에 이런 요청을 한 장학사, 비현실적으로 강의 일정을 잡은 교육청 담당자 등 그 누구에게도 화를 내지 못한 거지요. 그때 이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의 그 화가 모두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게 바로 학교 폭력입니다."

우리 속담에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 가서 눈 흘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울서 매 맞고 송도 가서 주먹질한다'거나 '읍에서 매 맞고 장거리에서 눈 흘긴다'는 말도 있지요. 사실 '분노'란 이런 겁니다. 터트리지 못한 감정이 제 원인을 찾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터져 나오는 것, 그것이 분노의 본질이지요. 그리고 그 화는 항상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곳에서 폭발합니다. 관계를 타고 흐르던 분노의 힘이 약한 고리를 만나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것이지요. 때린 놈에게는 대거리하지 못하고 나보다 힘이 약한 놈을 찾아가 화를 터뜨리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화가 난 진짜 원인을 찾지 못한 채 새로운 분노의 씨앗만을 만들며 살아갑니다. 시인 김수영이 말했듯이 진짜 분노할 일에는 분노하지 못하고 설렁탕집 주인 여자한테만 욕을 퍼부으며 살아가는 거지요. 요사이 만연한 학교 폭력이나 '묻지마 폭력'의 원인도 사실은 폭력의 현장이 아닌 다른 곳에 있을 겁니다. 그러니 뺨 맞고 화난 내 마음을 잘 들여다보고 그 감정은 감정대로 소중하게 다루면서, 정작 내가 어디에서 뺨을 맞았는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엉뚱한 화풀이로 또 다른 누군가의 분노를 만드는 연쇄 고리를 끊어 낼 수 있습니다. 내 화를 다스리지 못하면 피해자였던 내가 어느새 폭력의 가해자가 되어 또 다른 분노의 고리를 만들고 맙니다.
밤늦게 불 꺼진 대학 연구실 계단을 내려가다 크게 다칠 뻔한 적이 있습니다. 건물을 나오면서 경비를 보시는 분께 불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분은 상급자의 지시에 따라 성실하게 자신의 직무를 수행했을 뿐입니다. 구성원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은 행정, 강사들에 대한 부당한 처우, 불합리한 경비 절감 정책 등 여러 문제가 결부된 사안임에도 정작 갈등의 고리는 대학에서 가장 힘이 없는 경비원과 시간강사 사이에 형성된 것이지요.

'제 언치 뜯는 말'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언치는 말 안장 밑에 깔아 등을 덮어 주는 방석이나 담요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제 동료나 동족을 해치는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속담입니다. '갈치가 갈치를 문다', '망둥이가 제 동무를 먹는다', '비렁이끼리 자루 뜯는다' 등도 모두 같은 의미의 옛말입니다.

힘을 합치고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야 할 사람들과 어리석게 대적하느라 진짜 분노의 대상을 찾지 못하면 결국 제 몸을 다칠 뿐입니다. 어리석은 분노가 우리를 집어삼키기 전에 진정한 연대의 대상을 찾아 깊이 공감해야 합니다. 제 동료나 제 새끼를 집어삼키는 망둥이의 어리석음을 피하려면 분노를 이기고 그 원인을 직시하는 내면의 힘이 필요합니다. 전화를 불친절하게 받는 서비스 직원, 양보 운전을 하지 않는 앞차의 운전자 등은 모두 이 숨가쁜 시대를 힘겹게 헤쳐 가기에, 안타깝기 그지없는 연민의 이웃들입니다.
     

글_김영희

경기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구비 문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비극적 구전 서사의 연행과 '여성의 죄'>, <한국 구전 서사 속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신경증 탐색>, <한국 구전 서사 속 '부친살해' 모티프의 역방향 변용 탐색> 등의 논문과 <구전 이야기의 현장>, <숲골마을의 구전 문화>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