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혹은 공기업 직원에게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던 '철밥통'의 신화가 세기말 불어 닥쳤던 구제 금융 사태 직후 '대마불사'의 신화와 함께 깨지는가 싶더니 여전히 우리 사회의 화두로 남아 있다. "역시 철밥통……갖가지 항목 수당 상상 초월2013. 1. 1.”, "철밥통 공기업 청년 일자리 잡아먹는다2013. 1. 14.”, "특별 사법 경찰권 준다는데…… 철밥통 깨질라 거절한……2013. 3. 27." 등등. 새로운 천 년이 시작된 지도 10년을 훌쩍 넘긴 지금도 신문에서는 '철밥통 신화' 운운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사정은 같은 모양이다. "日 공무원 철밥통 깨질까2013. 4. 2.”, "中 명문대 졸업생 철밥통만 찾는다2013. 3. 27.”
'밥통' 또는 '밥그릇'은 그저 밥을 담는 도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때론 '일자리'를, 때론 '밥만 축내고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렇게 '밥통'이나 '밥그릇'이라는 말이 어떤 뜻으로 쓰이는지를 이리저리 살피다 보면 '철밥통'은 '해고될 염려가 없는 직업, 또는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는 것을 유추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엑끼, 이놈, 그런 소린 함부로 하다가 누구 밥통 떨어지는 걸 보려구 그러냐? 《강효순, 찔레꽃》북한
출세했으면 밥통이 든든한 국영 기업에 나를 밀어 넣는 게 아니라……. 《한정길, 달과 별》중국
'철밥통'은 1980년대 중국에서 '해고될 염려가 없는' 국영 기업체 직원을 '티에판완鐵飯碗’ 혹은 '지엔판완金飯碗’으로 부르기 시작한 데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국 동포 작가들의 문학 작품에 나오는 '철밥통'과 '쇠밥통'은 바로 '티에판완' 즉 '철반완'과 '지엔판완' 즉 '금반완'을 각각 우리말로 바꾼 말이었던 것이다.
나의 마음속에 있는 총각은 돈깨나 있는 사람도 아니고 철밥통을 가진 그런 사람도 아니지요. 《한정길, 처녀의 비밀쪽지》중국
우린 철밥통을 달고 다니는 그런 국영 일군하고는 판판 달라요. 《지원순, 두 사돈》중국
망할 녀석들이 그까짓 쇠밥통깨나 찼다고 달덩이 같은 우리 딸을 쓴 외오이: 필자 주 보듯 해? 《김훈, 시름거리》중국
언니를 좀 봐라, 쇠밥통을 얻었으니 매달 발가닥거리는 봉금 돈을 헤며 살아가는 게……. 《한원국, 성내지 마세요》중국
* 중국과 북한 소설의 인용문은 원문을 그대로 따르되, 띄어쓰기는 일부 수정함. 이하 같음.
우리나라에서 '철밥통'이 문헌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후반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신문에서 이 말이 종종 쓰이기 시작했으며, 문학 작품에는 2000년 이후 작품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철밥통'만큼은 아니지만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쇠밥통'도 종종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무원인 시인은 …… 철밥통은 옛말이지. 잘리지 않으려고 아주 파리처럼 산다는 말을 하면서도 웃는 얼굴이었다. 《김종광, 처음의 아해》
기업의 구조 조정은 그렇게 다그치면서 자신들의 철밥통은 굳게 지키고 있다. 《박병상, 참여로 여는 생태 공동체》
교수직을 영원히 지닐 쇠밥통으로 여기는 한, 대학은 사회의 경쟁 대열에서 낙오하고 만다. 《한겨레, 1997. 3. 19.》
북한의 문학 작품에서는 '철밥통'은 보이지 않고 '쇠밥통'만 나타난다. 그런데 이 말은 지금껏 얘기해 온 '철밥통'과는 전혀 뜻이 다르다. '쇠밥' 즉, 쇠를 깎거나 자를 때 나오는 찌끼를 담는 통을 가리키는 말이다. 북한에서도 그 개념은 존재할지 모를 일이나 사회적 특성상 남한에서 쓰는 뜻으로 '철밥통'이라는 말이 공개적으로 쓰일 리 만무하다.
현장을 돌아보던 중 혜심은 어느 한 기대 앞에서 한 청년이 회전 쪼르로기에 새 소재를 물리면서 꽁다리 소재를 기대 밑의 쇠밥통에 버리는 것을 보았다. 《손광영, 웃는 처녀》북한
'철밥통'은 2009년에 나온 《고려대 한국어 대사전》에서 처음으로 사전에 실리게 된다. 여기서 '철밥통'은 '철로 만들어서 튼튼하고 깨지지 않는 밥통이라는 뜻으로, 해고의 위험이 적고 고용이 안정된 직업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풀이되어 있다. '쇠밥통'이 실린 사전은 아직 없다.
요즘에는 '유리밥통'이라는 말도 쓰인다. '철밥통'과는 달리 '깨어지기 쉬운 밥통', 즉 '언제라도 잘릴 수 있는 안정적이지 못한 직업, 또는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유리밥통'은 중국 동포 작가 윤정철이 1983년에 발표한 소설에서 처음 확인할 수 있으며, 1990년대 후반의 우리나라 신문에서도 그 쓰임이 확인된다.
인물 고운 처녀는 철밥통에게 시집가고 그 다음 고운 처녀는 소료밥통에게 시집가고 찌꺼기는 유리밥통에게 시집간다고……. 《윤정철, 흘러간 세월》중국
외환위기 이후 고용 불안으로 온국민이 '유리밥통'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법조계가 언제까지 '강철보온밥통'을 유지하게 될지 여부는 오로지 국민의 관심과 감시에 달려 있다. 《매일경제, 1999. 1. 13.》
'유리밥통'이니 '철밥통'이니 하는 말이 많이 쓰인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고용 불안에 시달리고 있으며, 팍팍한 삶을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리라. 아주 크고 튼튼한 밥통, 누구든 와서 편안히 밥 한 끼 나누어 먹을 수 있는 그런 밥통을 부르는 말이 생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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