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우리 말♠문학 자료♠작가 대담

재미있는 우리속담 ④ 영등할매 며느리 데려온 바람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4. 24. 09:59
728x90

 

223
 
 

 

 

“내일은 바람이 초속 2미터로 불겠습니다. 야외 나들이를 하셔도 좋겠습니다.” 날씨 알림이가 다음 날 바람의 세기를 알려줍니다. 요즘 세상엔 바람에 이름이 없습니다. 그저 바람의 세기와 속도만이 언급될 뿐이지요. 산바람, 들바람, 하늬바람, 건들바람, 산들바람, 된바람, 마파람, 봄바람, 가을바람, 실바람 등 그 많던 바람의 이름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옛사람들이 마주한 바람에는 표정도 있고 색깔도 있었습니다. 화난 바람, 웃는 바람, 살랑대는 바람, 덮치는 바람 등 사람들은 바람에 감정을 더하고 이야기를 입혔습니다. 그래서 봄날 아침 저녁으로 부는 찬 바람을 두고 ‘봄철 갈바람에 여우가 눈물짓는다’는 우스갯소리를 만들기도 했지요. 사람들은 세차기보다는 매섭고 무섭기보다는 얄미운 봄바람을 여우마저 울리는 고약스러운 놈에 빗대었습니다.

 

봄철 부는 고약한 바람 중에는 ‘영등할매 며느리 데려온 바람’도 있습니다. 영등할매는 바람의 신이자 생산의 신입니다. 집안의 대소사와 살림살이를 두루 보듬어 주는, 한마디로 어머니들의 소망을 관장하는 신입니다. 어머니들은 영등할매에게 올리는 상에 농기구나 자식들의 책가방을 함께 놓기도 했습니다. 농사가 잘되어 집안 살림이 넉넉해지고 아이들이 공부를 잘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어머니들의 첫째가는 소망이었던 탓입니다.

 

음력 2월 초하루에 모시는 영등할매는 성격이 까다롭기로 유명합니다. 비린 것을 싫어하고 조금이라도 정성이 부족하면 바로 재앙을 내립니다. 오죽하면 영등 떡 만들 쌀을 쪼아 먹은 새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을까요? 성질 고약한 영등할매는 딸을 데려오면 기분이 좋아 순한 바람을 일으키고, 며느리를 데려오면 심술이 나서 사나운 바람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옛 사람들은 봄바람에 따라 한 해 농사의 풍흉을 점쳤습니다. 영등바람이 순하면 농사가 잘되고, 풍년이 들면 살림살이가 넉넉해져 인심이 보드라워집니다. 그래서 영등할매를 달래는 마음은 간절하기만 합니다. 밤을 새워 첫닭이 울 때를 기다렸다가 가장 먼저 맑고 깨끗한 정안수를 떠서 영등할매에게 올리려고 했던 것물에 깃들어 사는 신성한 용의 정수, 곧 용의 알을 뜬다고 해서 이 일을 ‘용알뜨기’라 부릅니다도 모두 이와 같은 간절함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바람의 마음에는 이처럼 바람에 기댄 사람의 마음이 있습니다.

 

언젠가 어머니가 부르시던 민요 한 토막이 떠오릅니다. “선들선들 부는 바람 우리 어매 머리 빗고 치마 터는 바람인가 시원키도 시원쿠나.” 고단한 시집살이와 끝없는 집안 살림에 묶여 집과 들을 오가기만 하던 어머니가 오랜만의 외출 준비로 머리를 빗고 치마를 털 때 그 바람은 얼마나 상쾌하고 신명날까요?

 

‘봄바람은 첩의 죽은 귀신’이라 말할 때의 바람은 얄밉고, ‘바람 먹고 구름똥 싼다’ 할 때의 바람은 허황합니다. ‘못된 바람은 수구문으로 들어온다’ 할 때 바람은 불길하고 ‘바람세가 좋아야 돛을 단다’고 할 때의 바람은 신명납니다. ‘가루 팔러 가는 길에 부는 바람’은 심술궂고 ‘바람이 불다 불다 그친다’ 할 때의 바람은 고단합니다.

 

오늘 여러분 곁을 스쳐 가는 바람은 어떤 표정입니까? 지금 우리 사회에 불어오는 이 바람은 어떤 바람일까요? 가루 팔러 나선 길에 불어 대는 얄궂은 놈일까요, 아니면 돛 달고 나선 길에 불어오는 곱다란 놈일까요?

 


 

 

글_ 김영희
경기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구비 문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비극적 구전 서사의 연행과 ‘여성의 죄’>, <한국 구전 서사 속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신경증 탐색>, <한국 구전 서사 속 ‘부친살해’ 모티프의 역방향 변용 탐색> 등의 논문과 <구전 이야기의 현장>, <숲골마을의 구전 문화>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