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실제(失題)
김억
내 귀가 님의 노랫가락에 잡혔을 때에
그대가 고운 노래를 내 귀에 보내었습니다.
만은 조금도 그 노래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내 눈이 님의 맘의 꽃밭에서 노닐 때에
그대가 그대의 맘의 꽃밭으로 오라고 하였습니다.
만은 조금도 그 맘의 꽃밭은 보이지 않습니다.
내 입이 님의 보드라운 입술과 마주칠 때에
그대가 그대의 보드라운 입술로 불렀습니다.
만은 조금도 그 입술은 닫히어지지 않았습니다.
내 코가 님의 스며나는 향내에 취하였을 때에
그대가 그대의 스며나는 향내를 보내었습니다.
만은 조금도 그 향내는 맡아지지 않았습니다.
내 꿈이 님의 무릎 우에서 고요하였을 때에
그대가 그대의 무릎 이로 내 꿈을 불렀습니다.
지금 내 맘이 깨어 두 번 그대를 찾을 때에는
찾는 그대는 간 곳이 없고 님만 남았습니다.
아아 이렇게 살님은 밤낮으로 이어졌습니다.
(『해파리의 노래』.조선도서. 1923)
--------------
오다가다
김억
오다가다 길에서
만난 이라고
그저 보고 그대로
예고 말 건가.
산에는 청청(靑靑)
풀잎사귀 푸그로
해수는 중중(重重).
흰 거품 밀려든다.
산새는 리리
제 흉을 노래하고
바단엔 흰 돛
옛길을 찾노란다.
자다깨다 꿈에서
만난이라고
그만 잊고 그대로
갈 줄 아는가.
십리포구(十里浦口) 산 넘어
그대 사는 곳.
송이송이 살구꽃
바람에 논다.
水路千里수로천리) 먼 길을
왜 온 줄 아나?
옛날 놀던 그대를
못 잊어 왔네.
(『안서시집(岸曙詩集)』.한성도서. 1929)
------------
비
김억
포구십리(浦口十里)에 보슬보슬
쉬지 않고 내리는 비는
긴 여름날 한나절을
모래알만 올려놓았소
기다려선 안 오다가도
설운 날이면 보슬보슬
만나도 못코 떠나버린
그 사람의 눈물이던가
설운 날이면 보슬보슬
어영도(漁泳島)라 갈매기 떼도
지차귀가 촉촉히 젖어
너훌너훌 날아를 들고
자취 없는 물길 삼백리
배를 타면 어데를 가노
남포(南浦) 사공 이내 낭군님
어느 곳을 지금 헤매노
(『안서시집(岸曙詩集)』.한성도서. 1929)
------------------
삼수갑산(三水甲山)
김억
삼수갑산 가고지고
삼수갑산 어디메냐
아하 산 첩첩엔 흰구름만 쌔고쌨네.
삼수갑산 보고지고
삼수갑산 아득코나
아하 촉도난(蜀道難)이 이보다야 더할소냐
삼수갑산 어디메냐
삼수갑산 내 못 가네
아하 새드라면 날아날아 가련만도
삼수갑산 가고지고
삼수갑산 보고지고
아하 원수로다 외론 꿈만 오락가락
(『민요시집(民謠詩集)』. 한성도서. 1948)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 > 모음 시♠비교 시♠같은 제목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용운 - 님의 침묵 / 이별은 미의 창조 / 알 수 없어요 / 나룻배와 행인 / 당신을 보았습니다 / 찬송 / 사랑의 끝판 (0) | 2013.06.09 |
|---|---|
| 김소월 - 여자의 냄새 / 초혼 / 무덤 / 차안서 선생 삼수갑산운(次岸曙 先生 三水甲山韻) / 진달래꽃 / 산유화 / 접동새 (0) | 2013.06.07 |
| 신경림 - 겨울밤 / 파장(罷場) / 농무(農舞) / 목계장터 (0) | 2013.06.04 |
| [이병기] - 야시/별/보리/백묵 (0) | 2013.06.04 |
| 들끓는 고요 / 이수익 - 딱정벌레가 되고 싶었을 때 / 복효근 (0) | 2013.06.03 |